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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 1일 양수가 터지다

내가 너를 지킬 거야

by 코지그린

우리의 예정일은 8월 7일이었다.

8월 7일.

8월 7일.

나는 매일 결승점인 그날을 생각했다.


5월 27일. 3주 만에 병원 진료를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교수님은 날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무조건 생존합니다."

"지금 태어나도 아기는 무조건 삽니다."


당시 아기의 주수는 29주 5일이었다. 교수님은 지금까지 잘 견뎠다며 아기는 무조건 생존한다고 하셨다. 교수님의 말이 귓가에 왕왕 맴돌았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기가 생존한다. 이전과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인데 마치 꿈속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교수님은 제왕을 하자고 하셨고 출산일은 38주 0일인 7월 24일로 정해졌다. 진료 후 평소와 똑같이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이틀 뒤인 5월 29일, 드디어 대망의 30주가 되었다. 12시가 땡 하고 30주가 되었을 때 내 마음속에서는 박수갈채와 기쁨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누구에게는 30주가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주수겠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힘겹게 마주한 감사한 주수였다. 앞으로 56일만 있으면 아이를 건강하게 만날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30주 0일을 평범하게 보내고 잠이 들었다.


30주 1일 오전 5시 30분.

1박 2일로 워크숍을 가는 남편은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나도 동시에 눈을 떴다. 내가 눈을 뜬 이유는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아주 짧고 강렬한 기분 나쁜 꿈이었다. 임신 기간 동안 마음이 편해서인지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꾼 악몽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일찍 일어난 남편 역시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며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보겠다고 했다. 내 꿈은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내용이라 설명 없이 그냥 나도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오늘 하루를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며 배를 만졌다. 한동안 아기 태동이 느껴지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태동을 기다리는 그 짧은 찰나에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태동을 느꼈고 잠을 더 청하려고 몸을 돌아 누운 그때였다. 소변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소변이라 후다닥 뛰어 화장실로 향했다. 놀란 남편이 뒤 따라왔고 나는 아주 많은 양의 소변을 보았다. 남편과 나는 둘 다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소변이지? 소변 맞지? 하며 되물었다. 오늘은 고작 30주 1일이고 아기는 앞으로 56일은 더 뱃속에 있어야 했다. 절대 소변 이어야 했다. 2년 전 양수가 터졌던 날을 떠올리니 진짜 악몽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놀랍도록 그때와 증상이 비슷했다. 다시 몸을 꼿꼿하게 세워 가만히 서 있어 보았다. 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래 양수 일리 없어! 다시 남편은 샤워를 하러 갔고 나는 다시 평온한 아침을 맞이하려고 할 때였다.


식탁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물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양수였다.

양수가 분명했다.

아이를 보냈던 2년 전과 똑같은 증상이었다.


나는 트라우마에게 말했다.

‘이럴 줄 알고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어.

다시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면 그때는 단호하게 대처할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아기를 지킬 거야!’


당황하지 않고 딱 한번, 있는 힘껏 남편을 불렀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양수가 덜 새도록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했다. 샤워 도중 뛰쳐나온 남편에게 양수가 터졌다고 말했고 이어 119에 전화를 했다. 119에는 아주 침착하게 내 증상을 이야기했고 이전에도 20주에 이런 이력이 있어 아기를 잃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필요한 짐을 싸라고 했다. 당시 출산가방을 단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기에 (출산 가방 준비는 금기 사항이었다) 가져갈 짐이 별로 없었다. 짐을 싸다 말고 남편은 나에게 4일 전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말을 했다. “걱정 마 무조건 살아. 무조건 산다고 했어” 그럼에도 오늘이 30주 1일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팠다.


교수님의 말에 내 마음이 안도를 해버렸던 걸까?

그래서 내 자궁도 함께 긴장을 풀어버렸던 걸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태동이 잘 느껴지지 않아 마음이 점점 두려워졌다.


드디어 119가 도착했다. 안방 침대에 누워 바라보니 우리 집 거실로 응급 구조할 때 사용하는 이동식 주황색 침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구급차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이동해야 했다. 양수가 샐까 두려웠지만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조용했던 동네가 119로 소란스러웠다. 119 구급차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제일 큰 소리를 내며 출근길을 가르고 병원으로 향했다. 차로 집에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병원이었다. 많은 사람의 배려 덕분에 출근시간임에도 4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동하는 40분 동안 태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도착할 때쯤 엄마 나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태동이 느껴졌다.


아침 7시쯤 내가 다니는 병원 분만장에 도착했다. 7월 24일에 왔어야 하는데 5월 30일에 와버린 분만장. 간호사 선생님께서 이름과 아기 주수, 증상을 물었고 바로 아기 태동과 심박을 체크했다. 이어 초음파도 보았다. 양수는 많이 줄어있었지만 다행히 아기는 건강했다. 양수는 조금만 새는 것이 아니고 양막이 완전 파수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절망적이었지만 모두들 아이는 무사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2년 전에 있었던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계속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소변줄을 찼고 바로 고위험 임산부 집중 치료실로 입원을 했다. 2년 전과 모든 것이 놀랍도록 똑같았지만 뱃속 아이는 30주를 넘겼고 내 마음도 그때의 아픔에서 살아남았기에 몸과 마음은 완전히 다른 상태였다. 출근하신 교수님께서 왜 이렇게 일찍 왔냐며 앞으로 항생제를 맞으며 주수를 조금 더 채워 출산을 하자고 하셨다. 제일 위험한 것은 감염이니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다.


아기를 건강하게 낳아주고 싶었다.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되는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현대 의학으로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완벽한 자궁에서 아기를 하루라도 더 키워야 했다. 다행히 30주가 지나면 양수가 새더라도 아기의 소변으로 금방 양수가 채워진다고 하셨다. 양수는 계속 새고 아기는 계속 오줌을 만들고 나는 소변줄을 차고 누워 항생제와 자궁수축억제제를 맞으며 주수를 채우면 되는 거였다. 감염만 조심하면 된다. 입원 첫날 혹시라도 일어날 출산을 대비해 폐성숙 주사를 맞았다. 최소 2번은 맞아야 된다고 했다. 24시간 간격으로 한 번씩 맞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적어도 이틀은 무조건 아이를 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니 이틀이 아니라 한 달도 넘게 버틸 수 있어.

남편에게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아기에도 내가 무조건 더 오래 품겠다고 말했다.

아기를 더 품을 수만 있다면

소변줄을 차고 하루종일 누워있는 것쯤이야

몇 달이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소변 줄을 차고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대신 열심히 밥을 먹었고 누워서 양치를 하는 호사를 부렸다. 다행히 첫날을 무사히 넘겨 다음날 두 번째 폐성숙 주사를 맞았다. 매 시간 태동검사와 심박수를 체크했고 감사하게도 초음파 상으로 입원한 첫날보다 양수 양이 늘어있었다. 참 기특한 우리 아기. 그리고 아기의 몸무게가 1.6kg으로 보인다고 했다. 분명 4일 전 진료에서 1.29kg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아기가 스스로 급하게 몸집을 키웠던 걸까? 몸무게를 들으니 아기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입원한 지 3일째 되던 날 아침.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데 몸이 이상했다. 점점 몸이 추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2년 전 양수가 터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갑자기 몸이 추워지며 열이 났던 것과 너무나도 똑같은 증상이었다. 몸에서 열이 난다는 것은 감염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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