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거듭하면서 경험이 쌓이고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 순간이 계속 온다. 어릴 적에 읽었던 책을 나이가 들어 다시 읽을 때,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등장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거나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행간의 의미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소위 '세계명작'에 분류되어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 중에,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이 있다. 앤이 길버트와 싸우는 장면 정도만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은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건 넷플릭스의 드라마 '빨간머리 앤' 덕분이다. 우연한 기회로 이 드라마를 보고, '세상에, 이 책이 이렇게 감동적인 책이었단 말이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앤이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인 건 태생적으로 그런 성향인 것도 있겠지만 끝없는 외로움을 견디는 방식을 스스로 찾아낸 결과이기도 함을 이제는 이해한다. 마릴라가 일을 시킬 남자아이를 원했던 것, 고로 처음에는 앤을 못마땅해했던 것도 이제는 이해한다. 그래서 그랬던 마릴라가 앤이 다쳤다는 소식에 언덕을 정신없이 뛰어내려갈 때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앤에 대한 마릴라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왜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는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이가 들면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이 많아진다 했다. 앤의 마음, 마릴라의 마음, 매슈의 마음, 길버트와 다이애나의 마음... 그 모든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나 역시 앤과 같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며, 마릴라 같았던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고, 내게 매슈 같은 어른과 길버트 그리고 다이애나와 같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오랜 세월이 흐르면 지금과는 또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오겠지. 그런 순간, 그리고 그런 순간에 물밀듯이 다가오는 울림은 책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