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 토박이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천안으로 이사 가서 초, 중, 고, 대학까지 천안에서 다녔으니 천안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천안호두과자
21세기에 조선시대 멘탈을 가지신 종갓집 장남인 아버지의 덕택으로 남의 집에서 한번 자본적이 없었다. 대학 때도 통금시간은 오후 8시, 같은 과 친구들과 엠티는 한 번도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사셨을 듯한 조선시대, 풍속화첩_씨름,김홍도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시던 교육대학원에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집을 떠나 서울로 올 수 있었다. 드디어 오후 8시 넘어 깜깜할 때 지인들과 약속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도 왔다!!
서울살이 1년 차, 어느 날 사촌동생과 대학로에서 술 한잔 하기로 약속하고 어느 주점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어느 외국인 무리가 우리 옆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외국인인가 보구나 하고 있는데, 사촌 남동생(이하 도른자로 명명/ 평소에도 똘끼 충만)이 갑자기 그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웨얼 알유 프롬을 시전 하였다.
어이쿠나,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나는 모르는 사람한테 말 거는건 딱 질색인데...도움을 요청하며 내 얼굴을 바라보는 도른자 사촌동생...웨얼알유프롬 이후의 외국인들의 설명은 내가 도른자 씨의 전용 통역사가 되어 설명을 해야 했다.
어학연수는 조선멘탈 아버님 덕에 한 번도 가지 못했지만, 천안의 모 회화학원에서 갈고닦은 실력 덕에 영어는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유럽 여러 국가에서 모인 현대무용단이었고,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인터내셔널 아트 페스티발 때문에 한국에 왔다고 했다. 그들은 다음날 공연에 우리를 초대했다. 와플씨는 공연에서 타악기를 담당하고 있었고 드러머라고 했다.
도른자 씨는 그 공연에 가고 싶어 했고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사실 가기 귀찮은 쪽에 속했다. 도른자 씨가 계속 졸라대며 나중엔 화까지 냈기에 나는 그다음 날 약속을 하고 공연에 갔다. 가기 싫었던 내 게으름이 미안해 지는 너무 재미있었고 즐거운 공연이었다.
내가 누구인가. 조선멘탈 아버님의 딸이 아니겠는가. 뭔가를 받았으면 감사의 표시는 해야 한다 생각해 공연장 직원분에게 핸드폰 번호를 남겼다. 적어도 감사표시는 말로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하여 와플씨와 연락이 닿았다. 와플씨는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나는 와플씨의 저녁식사를 나와 도른자 씨 모두를 초대 한 저녁으로 생각하고 도른자 씨와 함께 약속장소로 나갔다. 그것이 우리의 첫 데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