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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May 24. 2024

꿈의 집으로 이사, 소개는 좀 불편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좋아하는 집순이들이었다.

한국에서도 복잡한 도시 생활만 했던 우리 가족은 중국 한인타운에서의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고 꿈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꿈의 집이라고 하면, '넓고 크고 으리으리한 집'을 상상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주재 수당 내에서 한정된 집을 봐야 했고, 주재 수당을 초과한다거나, 불필요한 관리비를 지불해야 하는 일은 외벌이로 가정을 책임지는 우리 집 자린고비 남자에게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주택단지에 들어왔지만,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독채 하우스는 돈을 모아서 돌아가고 싶은 직장인 가정에게는 높은 문턱이었다. 또 이곳에서는 아이를 고용하여 집안일의 손을 많이 줄이기도 하지만, 나는 성격상 아이를 쓰고 싶지도 않고, 체력이 안 좋아진 내 상황에서 집관리가 온전히 내게 맡겨지는 것에도 부담이 있었다.


내게 꿈의 집이라고 하면 그냥 단순했다. 자연과 함께 살 수 있는 조용한 곳, 흰 벽(중국 월세집은 대체적으로 오래된 옛날 인테리어이다.), 하늘과 나무가 보이는 햇살 좋은 큰 창문, 이국적인 분위기, 우리 스타일로 꾸며진 깔끔한 가구들. 우리 집주인은 이 집을 구매하고 우리가 첫 세입자라서 벽을 흰색으로 깨끗하게 칠하고, 새 냉장고와 새 세탁기를 제공해 주었다. 가구도 본인의 스타일로 누가 봐도 몇십 년은 쓸만한 튼튼한 중국 가구로 맞춰준다고 했지만, 나는 이케아에서 구입한 스타일로 단출하게 살고 싶었다. 주인에게 렌트비를 협상하여 가구는 우리가 직접 구매하고, 나갈 때는 가지고 간다는 조건으로 집을 계약했고, 다시 신혼살림을 장만하듯이 침대, 식탁, 소파, 책상, TV 벤치, 수납장 등을 모두 이케아에서 구매하여, 큰 물건들은 조립을 맡겼다. 이거면 꿈의 집 완성이다.


대신 단지 산책을 하며, 또 이웃단지를 돌며 마당 쓸고, 개인의 집과 현관을 취향껏 장식하고, 봄이면 화분을 사거나 꽃을 심고, 정원사를 불러서 트리밍을 멋지게 하고, 큰 개 한 두 마리씩, 또는 세 마리까지 키우며 매일 같이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차고에서 맥주를 만드는 기계로 주말이면 그라지에서 작업 중인 아빠들을 보며 여유 있고 즐기는 삶에 대한 동경이 생기며 간접 체험에 만족했다. 또, 날씨가 추워지면 소소하게 의자에 둘러앉아서 모닥불을 쬐는 모습, 물론 나뭇가지 등의 준비와 뒤처리는 보통 남자들의 몫이었다. 때에 맞추어 현관과 지붕, 대문을 장식하는 모습에서 단지 산책을 하는 기분이 나날이 새로웠다. 처음이었다. 각박한 아파트에서 옹기종이 모여 모두 다 같은 자재, 같은 모양의 집에서, 엘리베이터에서 각 층, 호수 사람들을 만나고, 옆 집이어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곳에 살다가, 집마다 개성이 보이는 곳에서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보니, 순간 '집이란 이런 편안한 곳이구나.'라는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로망이 생기기도 했다.


중국 시내에서 들리던 배달 오토바이 소리의 행렬도, 도로의 소음도, 층간소음도 일단 소음 공해로부터 해방되었고, 밀집된 건물도 인구 밀도도 낮아서, 부대낄 필요조차 없고, 심지어 사람을 만나는 게 더 힘들었다. 높은 건물이 없다 보니 창문에 보이는 건 그저 새파란 하늘과 집의 지붕, 푸르른 나무들 뿐이었다. 약간 유럽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재원 발령 당시 처음부터 이곳에 살고 싶어서 여러 조선족 부동산들에게 문의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곳은 한국인이 살기에 힘들다, 집이 없다, 너무 가격이 비싸다.' 뿐이었지만, 두드리면 길이 열린다고, 어떻게 돌고 돌아서 처음에 내가 원하던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회사에서 나름 눈치를 보던 남편도 처음에는 이곳으로 오는 게 맞는지 자신도 속으로는 마음에 들었지만 겉으로는 표현하고 있지 않다가, 이사 온 첫날, 우리 셋이 단지와 동네를 걷고, 자전거를 타고, 강에서 물수제비를 하고, 그냥 보이는 길 따라서 걷고, 귀에 들리는 건 짹짹거리는 새소리뿐.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다. 남편도 점점 이곳에 매력을 느꼈고, "이곳에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다."라며 남은 주재원 생활 기간 동안 이사 없이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가 자연을 이렇게 좋아하는 집순이라는 것도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곳에서 잠시 속세와 떨어져 산 듯한 환경에서 살다 보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회사와 집의 경계가 분명한 남편 역시 만족도가 높았다. 또, 아침마다 새소리에 깨는 기분, 이웃집이 뭐하는지 보이기도 하고, 뭔가 이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기도 했다.


주변에 국제학교들도 있어서 외국인들이 참 많이 살기에, 나 같은 외국인이 살기에 편했다. 관리소도 영어를 하니, 중국에 살지만 중국이 아닌 곳 같기도 했고, 내가 아는 한국 사람들도 없고, 아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이 왔으니 뭔가 마음이 편안하고 말과 행동에 제약이 없자 해방감이 들기도 했다. 앞 집도 한 국제학교의 선생님네가 살았는데, 나의 첫 이웃이자 짧지만 소소한 스토리가 만들어지며, 짧고 굵은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이런 자유로움과 여유로움, 또 이국적인 느낌 외에도 가장 내가 원했고 만족했던 부분은 아이의 학교와 집의 거리였다.


한인타운에서는 차에서 보내는 시간도 꽤 많았고 매일 같이 고속도로를 타고 다녀서 차사고도 간혹 있고, 내가 학교에 한 번 가려고 해도 마음먹고 가야 하는 일이었다. 비싼 학비를 낸 만큼 사교육 대신 학교 생활을 충분히 누리고 왔으면 했는데, 학비에 포함되어 있는 학교 방과 후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거리가 멀어서 시간부터 생각해야 하고, 도서관을 이용하거나, 친구들과 놀 일이 생길 때 픽업부터가 늘 고민이라 아이도 나도 지치는 때가 많았다. 긴 시간을 불필요한 스쿨버스 시간에서 시간 낭비하며 감정소비를 할 일도 전혀 없어졌다.


이사 후에는 가장 만족했던 점이 학교버스를 타면 곧 학교에 내린다. 아침에 더 늦게 일어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시간적 여유가 상당히 생겼다. 아이들도 국적이 다양하니 버스가 소란스러울 일이 없다. 시간이 짧으니 그럴 새도 없이 등하교하기에 바빴다. 한인타운에서처럼 학교버스 등하교 시에 엄마들이 줄지어 모여있는 모습 자체가 없다. 그냥 멀리서, 또는 각자 개인 스케줄 별로 조용히 아이를 받아서 데리고 가거나, 자주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 하고, 아이(AYI)가 데리고 가는 사람도 많고, 딱 내가 상상하던 등하교의 풍경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스쿨버스의 구간별 책정 요금에서도 할인이 되어서 한인타운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스쿨버스를 이용하니 1석 몇 조였는지 모르겠다. 아이도 학교에서 하는 활동들에 마음껏 참여해도 픽업에 대한 걱정이나 저녁에 하는 미팅조차 부담이 전혀 없었다. 나는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기도 했다. 내가 딱 원하던 삶 그 자체였다.



물론 조용히 떠났음에도 알음알음 우리의 이사가 알려지면서, 남편 회사의 상사분이 이쪽으로 오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다. 우리가 한참 집에 이케아 가구를 보러 다니다가, 평일에 이 물건을 오늘은 꼭 들여와야겠다 싶어서 나랑 아이는 지하철을 타고 이케아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xx 부장님네 가족들이 갑자기 이케아에 오신대. 그래서 인사하고 싶다고. 알고나 있으라고."

아이도 학교에서 끝난 상태에서 가방 멘 채로 바로 지하철행에 오른 건데 갑자기 인사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이 분은 남편과 한국에서부터 인연이 있는 나름 직속 상사였었고, 인간적으로도 좋으신 분이라고 들었다. 대부분의 주재원들은 이곳에서 만나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분은 예전에 나도 어떤 자리에서 한 번 안면이 있어서 부담스럽지 않게 이케아 매장에서 간단히 얼굴 인사만 했다.


"어머, 그쪽으로 이사 가셨다면서요. 좋죠? 우리 애도..."라며 뭔가 다음을 요청하는 듯했지만, 내 입에서 먼저 "네, 여기 좋아요. 이쪽으로 오세요."라는 말이 나오지는 못했다. 어떻게 찾은 자유인데 까딱하면 남편은 드라이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참 인자하신 얼굴에, 우리 아이보다 훨씬 큰 자녀도 훈훈한 인상에 좋은 가족들 같았지만 또 부딪히게 되면 모를 일이다. 그냥 조용히 인사만 하고 우리는 타깃을 찾아 이케아를 휘젓고 다녔다.


또 한인타운에서 내가 가끔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본인 집에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해서 웬일 인가 해서 볼일 보고 잠시 들렸는데, 고민의 포인트는 자신이 이곳을 떠나고 싶다며, 본인이 알아볼 길이 없으니 부동산 정보를 줄 수 있냐고 요청했다. 아무 집이라도 괜찮으니 그냥 당장 이곳만 떠나면 된다며. 순간 엄청 망설였다. 회사 분한테도 주지 않았고, 전에도 누가 물어봤는데 불편해질 것 같아서 얘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얻은 기다려온 자유였고, 정말 고생 끝에 얻은 나의 노력의 결과를 달라는 요청에 고민하다가, 그분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고 있어서 단순하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후회됐던 점은 처음의 생각과 다르게 아무 집이나 괜찮다는 말은 사라지고, 마음에 드는 집을 얻기 위해 내가 중국에서 최고로 소중하게 여기는 나의 천사 같은 지인인 부동산을 조금 피곤하게 한 듯 보여서 소개해주고 조금 미안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소개라는 게 이래서 참 어렵다. 믿을 건 당신밖에 없고, 당장이라도 들어갈 것 같지만, 사람이란 게 또 집을 보다 보면 다른 욕심이 생기고, 점점 원하는 게 커지기 마련이다. 그때 내가 느낀 점은, 나의 천사 부동산은 언제 이사 올 수 있냐고, 또 너희 회사의 주택 지원금은 얼마인지를 물어봤는데, 그 사람은 날짜도 미정이다.(원래는 알고 있지만), 가격조차 정확히 내주지 않았다. 나는 궁금해서 물어봤다. 왜 가격 이야기를 안 해주는지. 가격을 이야기해야 집을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닌지. 그러자 나의 단순함과 다른 대답에 그 사람이 속으로 다시 보이는 계기가 됐다. "내가 미리 가격 이야기를 하면, 돈 가지고 장난할지도 모르니까." 이런 뉘앙스의 말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때 좀 '나를 믿지는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진실하고 착하고, 거짓 없는 이 부동산을 내가 믿고 알기에, 고민하다가 소개해준 건데, 그런 신뢰대신에 집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꼭 이 부동산과 거래를 했어야 하는 게 아니라, 믿는 사람을 소개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재고 따지는 모습을 보며 씁쓸했다.


내게도 우리 집은 렌트가 얼마인지, 회사 주택 지원금에서 돈이 남으면 어떻게 했는지, 이런 다소 황당한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돌려 말하며 정확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묻지 않는 스타일이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척했지만, 나는 이런 대화가 참 불편한 사람이다. 선을 넘는다고 생각한다. 집을 보고 오면 우리 집보다 밝지 않다, 우리 집보다 뷰가 별로다 등등,,, 우리 집과 비교를 하고, 다른 사람의 계약 조건이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이로서 굳이 남의 아픔이나 상황에 꼭 내가 늘 무언가를 해줄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나도 떠나는 날까지 나의 속 이야기를 하지 않고 불편함을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소통이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기도 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고마운 마음도 들고, 서로 다른 점이 많지만, 나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맞추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집을 구하는 것 역시 자신의 기호이고, 내가 굳이 동행할 필요가 없지만 집을 보러 이곳에 와있다는 전화에 반가워하며 시간이 된다고 나온 것도 나의 선택이었고, 받아준 것도 당시에 나의 의지와 내 판단이었으니까. 한인타운에 살 때도 크고 작은 인간관계들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자신들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정보를 얻거나, 나를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마음은 숨긴 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털어놓는 부류들이 있었지만 솔직하지 못하니 좀 불편했지만, 그녀는 그래도 꿈의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 이전까지는 그나마 내 속을 터놓는 몇 명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이런 일을 겪으며 점점 싫으면 "No." "싫어요. 안 할래요."가 건강한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필요한지를 느끼며, 도와준답시고 선의를 베풀다가 내 성격상 티도 내지 못하고, 혼자 상처받지 않는 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급했다면,, 믿었다면 자신도 당당히 오픈하고 그냥 계약했겠지만, 결국 다른 엄마를 통해서 다른 부동산에서 계약을 했다. '뭐야, 나 진짜 혼자 조용히 지내서 누구도 모르게 온 건데, 휴....' 괜히 나의 정보만 털린 기분이 들었지만, 나중에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움을 받는 일이 생기기도 했으니, 해외에서 이 정도면 뭐. 겉으로는 잘 맞는 듯 보여도 껍질을 하나씩 까다보면 서로 다른 색깔들이 짧은 시간에 타지에서 만난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 같다. 나이 들어도 인간관계는 힘들지만, 해외에서는 더더욱. 그러다 보니 애매하게 친해질 바에야 모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가 먼저 귀임했을 때, 또는 한국에 잠시 들어갈 일이 생겼을 때 정말 만나는 일이 몇이나 될지, 그게 지속된다면 그 사람은 진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우리는 꿈의 집 자체에서 우리 가족은 새로운 중국 주재원 생활을 했고, 남편 역시 술자리나 모임에 원래도 불러도 가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거리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더 멀어지고, 오히려 이쪽에 가까운 후배들을 챙겨주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으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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