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였던 아랫집은 은인이 되었다.
이사를 한 후 우리는 안타깝게 소음에 굉장히 예민한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수차례 겪던 층간소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우리는 어처구니없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남은 주재원 생활을 180도로 바꿀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사를 하고 2일인가 3일이 지났을 때였나?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고 누군가 우리를 찾아왔다. 인터폰 사이로 보이는 모습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중국같았고, 말을 할 수 없던 우리는 인터폰을 받지 못했다. 괜히 서로 얼굴을 알다가, 아이가 혼자 학교 버스를 타러 왔다 갔다 하던 터라 해코지라도 할까봐 좀 무서웠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랫집 사람이다는 걸 부동산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관리사무소를 통해서 연락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사하고 1주일이 안 되어, 아랫집에서 윗집이 시끄럽다는 항의가 계속된다며, 부동산으로부터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아랫집은 관리소로 연락을 했고, 우리가 말 못 하는 외국인임을 알고, 부동산으로 연락을 했던 거다. 그전 집에서 1년간 이런 일이 없었고, 심지어 우리는 주로 집에서 책을 읽기가 취미인 아이 1명에, 아들은 집에 오는 시간이 꽤 늦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니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고, 슬리퍼도 신었지만, 이사 전의 집보다 내구성이 떨어지는 집인지 아니면 바닥이 얇은지 알 수 없었다.
아랫집은 잠시도 참지 못하고, 무슨 소리만 났다 하면 노크를 하거나,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고, 부동산을 통해서 계속 연락을 받아 1-2달을 우리도 층간소음 노이로제에 걸린 상태에서 스트레스를 꽤 받았었다. 그러던 중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집을 좋아하는 집순이 가족이었지만, 층간소음으로 집에 있는 게 두려워지자 주말에 하루 정도만 외출을 하던 우리는 2일을 모두 외출을 하거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했다. 그날도 우리는 1박 2일로 근처에서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부동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모님, 지금 혹시 집에서 뭐 두드리시나요? 아랫집에서 또 전화가 왔는데요. 너무 시끄럽대요." 당황스러움과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나는 대답했다. "저희 지금 집에 없어요. 주말 내내 집을 비우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인데, 저희가 시끄럽다뇨. 저희도 참을 만큼 참았는데 도저히 이 집에 못 살겠어요." 진심이었다.
부동산은 한 번 아랫집 사람을 찾아가서, 사정을 들어보았다. 그들이 자신은 신혼부부고,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는데, 우리가 일어나는 시간이 너무 빨라서 아침마다 잠을 깬다고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출근과 등교 시간을 바꿀 수도 없는 거였고, 공중에 떠다닐 수도 없었다.
나는 부동산에게 제안을 했다. 한국에서도 소음 측정을 해보는데 중국은 내가 시스템을 모르니, 집주인, 관리소 직원, 부동산을 다 우리 집으로 불러서 소음의 원인을 찾아보자고 일정을 잡아달라고 했다. 이 집의 문제이면 집주인이 처리를 해줄 거고, 아파트 자체가 문제이면 관리소 직원의 판단이 있을 거고, 대체 우리의 어떤 소리가 그들을 그렇게 불편하게 하는 것인지 알고는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날이 되었다. 관리소 직원 몇 명, 중국 집주인, 부동산이 우리 집으로 모였고, 관리소 직원들 중 일부는 아랫집을 담당했다. 우리 부동산은 아랫집 사람과 통화를 하며 원시적인 방법으로 소음테스트를 시작했다. "지금 시작합니다." 나와 남편은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동작들을 진행해 보았다.
1. 평상시처럼 걸어 다니기
2. 청소기를 작동시켜서 청소하기
3. 의자 끌기
이런 식으로 하나씩 진행을 했는데 걸어 다녀도 소리가 난다, 청소기는 조금 시끄럽다 등등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에 반응을 하다가, 이런 소리보다 더 심한 소리도 있다며 억지를 피우는 통에 남편도 짜증이 나서 책장의 딱딱한 전집 5-6권을 바닥에 쿵하고 던져보았다. 당연한 소음이었다. 그제야 아랫집은 "맞아요. 저런 소리예요. 저런 소리가 계속 엄청나요." 이 모습을 지켜보던 집주인과 관리소 직원 및 부동산 직원에게, "보세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 소리를 내나요? 심지어 빈집일 때도 계속 시끄럽다고 연락이 오고, 우리가 내는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계속 이런 식으로 못 살게 구니 살 수가 없어요."
밥 먹고, 방과 소파에서 석고상처럼 앉은 시간을 많이 보내던 우리는 참다못해 이 집을 나가겠다고 선포했다. 처음부터 이런 집인 줄 알았으면 계약하지 않았을 거라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집도 아니고, 출근이나 등교 시간이 본인들과 다른 것까지 이야기하면 우리는 어쩌라는 거냐고. 집주인도 상황을 보고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보증금이었다. 1달치의 보증금을 집주인이 내주어야 우리도 다른 집으로 갈 수 있으니, 그걸 협의해 달라고 했고, 이사한 지 3달이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서 또 힘든 이삿짐을 싸고, 집을 구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미리 예상됐었다.
중국에서 첫 포장이사는 거의 물건을 던져주면 우리가 짐정리를 했어서 이사양이 만만치 않았지만, 남은 개월수를 이대로 살다가는 제정신에 못 살 것 같았다. 결국 협의 끝에 집주인인 보증금을 감사하게 내주기로 했고, 우리는 그 길로 진짜 그렇게 꿈꾸던 탈한인타운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남편은 회사 생활을 하고 눈치도 보이고 하니 자기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이미 이곳에서 내가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상태였고, 간간히 집을 보러 다녔었기에 현재 나오는 집만 있으면 언제라도 뜨고 싶었다. 모두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결국 우리는 이사한 지 3개월 만에 자비를 들여 또 이사를 하고, 새로 집을 구해야 했다. 몇 차례 한인타운을 떠날 기회를 놓쳤지만 이번에는 그 뜻을 꼭 이루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집을 보러 다니고, 남편한테 사진을 공유한 뒤, 주말이면 또 집을 보러 다니며 결국 우리 상황에 맞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내게 빵을 알려주며 따뜻함을 베풀었던 외국 엄마가 나의 집을 찾는데 연락처를 공유해 주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단지로 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아주 기대하고 있었다. 말은 한국 사람들보다 편하지 않았지만, 취향이라는 게 비슷했던 우리는 같이 마트에서 장을 보러 다니고 서로의 음식을 맞보고 배우며, 해외살이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줄 낯설지만 촉촉한 경험을 꿈꾸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자연 연 속에서 자연을 품고 있는 집, 차와 오토바이와 사람으로 붐비지 않는 전원스러운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당시에 어떤 문제로 인해서 잠시 우리한테 한때 차량이 제공되지 않아서 카풀을 이용하던 때라 출퇴근을 걱정했지만, 카풀이 지나가는 곳으로 나가서 대기해서라도 출퇴근을 하기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지만, 일이 풀리려고 했는지 다시 개인 차량이 주어져서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도, 남편도 나도 중국에서의 삶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장소나 순간이라고 하면, 다들 그냥 집과 동네일 정도가 되었다. 바라는 게 별로 없었기에 그냥 오롯이 우리 가족이 한적한 곳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긴다는 자체만으로도 하루하루가 힐링이었다. 그냥 창 밖만 보고 있어도 행복했다.
내가 조용히 이사를 가자, 학교 버스를 타지 않는 아이의 소식을 전해 듣고, 몇몇 한국 엄마들한테 위챗이 오기 시작했다. 어디로 갔는지, 집은 어떤지, 좋은 데로 갔는지 등등 평상시에 연락도 자주 안 하던 사람들의 연락을 받으며, 떠나도 궁금함은 끝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었지만, 점점 나는 그곳에서 잊혀 가기 시작했다.
인생은 굴곡의 연속이다. 때로 몸서리치도록 나를 괴롭히는 일이지만,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나를 다시 태어나는 만드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중국에서 살며 여러 이런 경험을 하며, 점점 인생에 대해서 담담해지고, 예전보다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기 시작했다. 지금도 소음에 예민했던 아랫집 사람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그분들 아니었으면 우리는 계속 한인타운에 살며 나를 숨긴 채 힘들어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