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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부쿠마 Dec 14. 2023

2. 집 없는 자의 역마살

돌아갈 곳이 없다

어릴 적에는 분명 부모님의 집에서 살아갔다.

세를 들어서 산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방 한 칸을 신혼부부에게 세를 주었다.


가세가 기울었던 건 IMF가 매섭게 몰아쳐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모두 부도어음으로 돌아왔을 때, 살던 집마저 친구의 빚보증으로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을 때, 결국 일신상의 이유로 어머니는 집을 떠나시면서 삼부자가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가게 되었다.


지금은 어릴 적 살던 집터가 재개발이 되어 흔적도 없다만 그 집을 떠나기 전 방한칸에 세 들어 살던 신혼부부 중 남편분이 집을 찾아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많이 컸구나 비록 지금 시기가 많이 안 좋지만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집안에 나밖에 없어 당시 초등학생으로서 무언가를 대접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먼 길을 찾아오셨을 터인데 극진한 대접은 아닐지라도 시원한 보리차라도 한잔 드리는 게 좋았으리라.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항상 바쁘게 그리고 밤늦게 귀가하시며 열심히 일을 하셨고 결과적으로 사업은 접으셨으나 대략 10년 만에 직장인으로서 다시 한번 능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잡게 되셨다.


마침 그 시기는 나의 군대 전역 이후였다.


무언가 가정에 도움이 되고자 학생 때부터 했던, 온갖 아르바이트며 교내근로 등 지난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차원에서 전역 1년 후 독립을 하였는데. 아르바이트는 해보았으나 경제관념이 자리 잡기 전이었던 어린 청년의 객기로 지금까지 서서히 다양한 경험이 쌓여 살아가게 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한 곳에 자리 잡지 못하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역마살'이 꼈다고 느껴질 정도로 수시로 지역을 이동했다.


첫 독립장소는 노량진이었다. 고등학생 때 포기했던 수능을 집안형편이 좋아지면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고 마침 거주하던 영등포를 떠나 의정부로 집을 이사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서울을 벗어나기 싫었던 마음도 한몫해버리고 말았다.


결과는 참패였다. 다시 재도전할 의사는 당연히 없었다. 순전히 돈 때문이었지만 시간도 아깝다고 느꼈다.


약 1년 동안의 수능공부 후 다음 행선지는 당시 만나던 애인의 거주지역이었던 시흥시 그중에서도 정왕동으로 이주를 했다. 이주 후 한 달 만에 헤어지긴 했다만 계약기간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1년을 살아 버텨내었다.


그 후 학업을 목적으로 또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는데 이건 지극히 대학명이 노출될 수 있기에 이번 지역명은 밝히지 않음이 좋으리라.


이렇게 독립 후 14년간 이주를 한 지역이 위 두 지역 이후 순차적으로 '관악구 신림동, 강남구 역삼동, 은평구 불광동, 분당구 정자동, 분당구 구미동, 동탄신도시,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 송파구 문정동,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강남구 역삼동,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관악구 신림동,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동대문구 장안동,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그리고 지금이 다시 신림동'으로 세어보니 22번의 이주를 하고 16곳의 지역을 경험했다. 이 중 고시원만 5곳에 잠시 갈 곳이 없어 얹혀살았던 곳이 7곳, 그리고 노숙이 한 군데 있다. 어찌 보면 인간적으로 제대로 된 거처가 없이 살아갔다 봐도 무방하다.


아직은 월세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만으로 2년여를 한집에서 살고 있으니 나름 선방했다고 생각하고 집이라는 공간에 정도 붙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준비하는 지금 내 마음속에서는 마지막 이사를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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