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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발 Oct 08. 2024

할머니, 엄마가 보고 싶다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길 일란 다 해야 한다



문삼석 님의 "그냥"이란 시가 있다. "엄만 내가 왜 좋아?" "그냥", "넌 왜 엄마가 좋아?" "그냥". 해가 거듭해 갈수록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뭐가 그리 어렵다고, 살아생전에 제대로 모시질 못했을까? 언제나 곁에 계실 줄 알았다. 요즘 부쩍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얼굴을 떠올려 보지만 흐릿하고, 가물 가물 하다.


사실 어릴 적 엄마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엄마는 언제나 아파서 누워 있었다. 아프기 전에 엄마 사진을 보니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참 이뻤다. 그래서인지, 엄마 별명이 "앵두"라고 했다.


엄마는 넷째 딸로 평범한 전주가 씨 댁으로 17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다. 고된 시집살이를 했고, 5남 4녀 자식들을 모나지 않게 잘 키웠고, 농사일과 장사로 집안 살림살이도 크게 늘렸다. 엄마는 가난한 사람, 주변 사람들에게도 베풀기를 좋아했고, 사리 분별이 뚜렷한 여장부였다고 했다.


그러던 어머니께 불행이 찾아왔다. 큰 형님 사업 실패로 누구보다도 억척스럽게 살아오고, 강한 엄마였지만 화병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그때부터 엄마는 민간요법과 병원을 오가며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며 몸져눕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활달했지만 외로움도 많이 탔고, 낯을 가리고 항상 허기져했다. 엄마,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엄마 나이 45살에 태어난 귀한 늦둥이였다.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다. 엄마, 아버지 사랑에 형과 누나들의 사랑까지 받고 살았다. 하지만 가끔 창피했다. 친구들이 엄마를 할머니라고 놀렸기 때문이다.     


국민(초등) 학교 입학식 때 아버지 손을 잡고 갔다. 중학교 때는 인천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친구도 많지 않았고,  가끔 놀림도 당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많이 썼고, 키도 작았다. 시골 학교에선 금배지, 은배 지를 받을 만큼 성적도 좋았는데 전학을 가서는 항상 중간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방학 때라도 고향에 가서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고 싶고, 엄마, 아버지도 보고 싶은데 공부 때문에, 여러 여건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낙방하고 지방으로 대학을 갔다. 엄마, 아버지의 실망은 컸다. 술과 담배도 배웠다. 방황을 했다. 군대에 자원해서 입대를 했다. 운 좋게도 졸업 전에 직장을 잡고, 일찍 결혼도 했다. 아이들이 늦게 태어났지만 잘 커 주었다. 승진도 제때제때 하고 무사히 정년 퇴임도 했다. 세월이 흘러 벌써 6학년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인가? 어머니께서 학교를 한번 찾아오셨다. 친구들이 할머니가 찾아왔다고 했다. 친구들은 엄마를 할머니라고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엄마 손을 잡지 않았다. 이후로 엄마에게 죄스런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제 곁에는 엄마와 아버지가 계시질 않는다.  


엄마는 장터를 다녀오시면 찐빵이나 과일을 한 광주리씩 사 오셨다. 형, 누나들보다 내 손엔 항상 한두 개가 더 있었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았다.


어머니께서는 고되고, 바람 잘날 없던 그 어려운 시절들을 어찌 견디어 내며 살아오셨을까? 이 세상에서의 엄마의 삶은 행복한 삶이었을까? 불행한 삶이었을까? 깊고 깊은 엄마, 아버지의 사랑을 알 길이 없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니, 아버지께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어머니,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마음을 담아 엄마, 아버지를 제대로 사랑하질 못했습니다. 철이 좀 들고 직장도 잡고, 결혼도 했었는데 자주 찾아뵙지도, 그 흔한 여행도, 맛집도, 이쁜 옷도 제대로 함에 있어 부족하고 부족했습니다. 이제 와서야 엄마, 아버지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고 싶습니다"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살아계실 때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 같이 모시고 살 수 있다면 최고의 효도이겠지만 살아 계실 때 전화 한 통,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뵈어야 한다. 정철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길일란 다 하여야 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손노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엄마의 애창곡 "봄날은 간다"를 불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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