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라나다, 파리, 밀라노, 오사카, 삼척
6. 아름다움을 게우는 수행
─ 그라나다, 에스파냐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한 무어인은
이를 갈던 기독교 세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나스르왕조 마지막 술탄 무함마드 12세는
마지막 근거지인 그라나다를 떠나면서 말했다.
영토를 잃는 것보다 궁전을 떠나는 게 더 슬프다고.
아랍인의 거주지였던 알바이신 지구,
성 니콜라스 전망대에 올라갔다. 알함브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설산을 배경으로
낡아가고 있었다. 지는 해는 잠깐
성채를 과거로 데려다주려고 붉어졌다.
이튿날 새벽녘부터 빗줄기가 거세졌다.
폭우가 우산살을 부러뜨리고 양말까지 흠뻑 적셔도
궁전을 근거리에서 둘러보다 가만히 응시하기는 설레는 일.
엊저녁 눈부신 광경에 오늘 쨍한 날씨가 더했다면
눈이 체할지도 몰랐다. 그라나다의 하늘이
나를 지켜주고 있었던 거다.
시도 때도 없이 궁전을 눈에 담아야 하는
저 불쌍한 고양이를 좀 봐라. 과식과 마찬가지로
과시(過視)도 몸에 이롭지 않음을 터득한 얼굴이다.
체기가 가시지 않아 여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살고 있다고 부러워하지 말라고 한다.
심미안을 낮추려고 고양이는 오늘도
아름다움을 게우는 수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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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몽마르트르 묘지에서 애도하는 고양이
─ 파리, 프랑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
바츨라프 니진스키.
하인리히 하이네.
자크 오펜바흐.
에밀 졸라.
스탕달.
갈.
몽마르트르 묘지는 한적했다.
세계 오페라 무대를 장악하고 있는
《라 트라비타》의 원작 소설가를 일별하고
말라르메의 시와 드뷔시의 음악 위에서 춤추던
발레리노의 《목신의 오후》 파격적인 안무를 상상했다.
멘델스존 가곡 〈노래의 날개 위에〉의 선율을 떠올리다가
조수미의 음성으로 각인된 〈인형의 노래〉로 선회했다.
프랑스 일등 양심 작가의 무덤은 반듯해 보였다.
살았다고, 썼다고, 사랑했다고 읊조리기도.
2018년 늦봄, 갈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그녀는
1907년 피에르 마르탱과 의기투합하여 합창단을 창설한
폴 베르티에의 외손녀다. 그녀도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의
노래를 들었겠지. 지금쯤 〈아베 마리아〉를 감상하고 있을까.
묘지 유리벽 안에, 딸 폴린을 사이에 두고 남편 미셸과
잠든 프랑스 갈. 그녀를 처음 만나던 중학생이 되어
〈오늘 밤은 잠들 수 없어요〉를 불렀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멀찍이서 애도했을
고양이를 불러 모아 함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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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양이성
─ 밀라노, 이탈리아
굳이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아침이 내려앉으면 아침을 덮고 잤다.
밤새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무엇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별의 배경이 되기로 했다.
무엇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돌덩이에서 조각상이 나오다가 멈춘 듯한
론다니니의 피에타.
여든여덟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유작을
품고 있는 성채처럼
성채를 받치는 돌무더기처럼
시간을 버티는 배경이 되고픈 고양이들.
사냥 본능을 잘라내고
비둘기 난입쯤이야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밤마다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순찰하고
햇살이 내려앉으면 성의 그림자를 덮고
잠이 들었다.
사람들은
스포르체스코성을
고양이성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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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지한 역사의 정물 되기
─ 히로시마, 일본
겐이 다시 내게 왔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거닐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기념관에 입장.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짐작게 하는 전시물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던 생존자들의 신음이
그들이 되풀이하여 외치던 언어가
내 안에 들어와 가슴벽에 부딪힌다.
뜨거워! 물! 아파요! 엄마! 죽고 싶지 않아…
20여 년 전 『맨발의 겐』으로
역사의 참혹한 페이지를 각인했던 순간.
원폭에서 살아남은 만화가의
반핵, 반전의 메시지는 스크린에 이어
뮤지컬, 오페라 무대에까지 오른다.
일본에서만 1,000만 부 이상 팔린
일본 만화책 중 최초 영어로 번역된
현재 수많은 언어로 인간애를 알리는
우리의 겐을 기념품점에서 마주한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제야 알았다, 원제목이 살짝 다르다는 것을.
‘나의 겐’이 다시 알려준다.
8월 6일은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투하된 날이라고.
가로막은 원폭 돔에 자유로이 드나들며
정지한 역사의 정물이 되기로 작심한
검은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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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의 고양이, 나의 첫 독자
─ 삼척, 대한한국
무작정 걷기는 여행의 묘미 중 하나.
목적지 없이 발이 이끄는 대로 길을 걷는다.
낯선 마을을 지나가다 낯선 고양이와 눈을 맞춘다.
나를 따라 담을 걷는다. 내가 멈추면 다시
눈을 맞추려고 한다. 다시 걷다 또
눈을 맞추면서 전생의 페이지를 뒤적거린다.
어쩌면 우린 키프로스섬 출신일지도.
9,500년.
고양이와 인간이 공존한 시간이다.
인류가 농사를 시작한 시기와 얼추 일치한다.
수확한 곡식을 갉아먹는 쥐 때문에 골머리 썩다가
떠올린 묘책이 고양이와 함께 살기. 키프로스에서 발굴된,
인간과 나란히 묻힌 8개월령 리비아살쾡이 유골이
역사의 일부분을 수정했듯이 더 오래된 유골이
재수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10년.
고양이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다.
쥐 한번 잡아보라고 농사를 지을 순 없는 노릇.
헝겊 쥐만 열심히 잡으라고 독려하고 있으나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것이 예전 같지 않다.
시들해진 흥미가 다시 부풀 수 있도록
새로운 놀이를 찾아줘야 한다. 옳지!
이 원고가 완성되면 첫 독자 역할을 맡겨야겠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탈고한 원고를
자신의 고양이 타기에게 먼저 읽어주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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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놀 때면 녀석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인지 내가 녀석을 즐겁게 하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많다.
- 미셸 드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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