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썩어 문드러진 거 맞네.
아침부터 서둘러서 아빠 선배 아저씨의 한의원으로 갔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이미 환자가 많았고 40분 정도 기다렸다. 유명하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거의 다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온 나이 든 자식들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 우두커니 혼자 앉아서 나의 엄마 아빠를 생각했다.
아저씨, 아니 선생님이 진료실에서 나와 직접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래 아빠한테 전화받았어요. 요즘 피곤해서 약 짓고 싶다며. 맥을 좀 짚어볼게요.
블라우스를 걷어서 손목을 내밀었다.
흠. 보통 피곤한 맥이 아닌데. 혹시 요즘 뭐 우울증 약 먹거나 그래요? 무기력하다거나.
아빠는 선배 아저씨에게 내 결혼 소식을 알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나는 애초에 정말 가족 위주의 작은 결혼식을 했던지라 엄마 아빠는 축의금을 받는 것도 거부하고 주변에 청첩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연예인의 비밀 결혼식처럼 조용히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한의원에 가기 전에 아빠한테 조심스레 물어봤다.
- 아빠 아저씨가 나 결혼한 거 알아? 나 가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돼?
- 아니 아예 모를걸. 아빠가 청첩도 안 했어. 건너 건너 들을 수도 없을 거야. 중간에 낀 사람이 없어서. 결혼식장 어디라고 사람들한테 말 나오고 그런 거 싫어서 아빠 회사에도 안 알렸잖아.
선생님은 3년 전에 왔을 때랑 상태가 너무 다르다며 오늘은 침도 맞자고 하셨다. 무슨 일 때문에 우울한 건지는 묻지 않겠지만 혹시 아빠도 아시냐고, 맥이 너무 안 좋아서 아빠가 크게 걱정하실 것 같다고 했다.
사실 거의 1년째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고 말하니깐 잘하고 있다고 했다. 양약 한약 가리지 말고 약은 몸에 잘 쓰면 다 좋은 거라고. 그러니깐 우울증 약이라고 너무 거부감 갖지 말라고.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한숨을 쉬는 게 아닌데 계속 숨을 들이마셔도 가슴 정중앙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선생님이 화병은 참아서 생긴 병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연주는 원래 기질이 우울한 사람이 아닌데. 그럼 우울증은 그 원인이 해결돼야 없어질 거야. 그때까지 잘 버틸 수 있게 약을 좀 지어줄 테니깐 매일 먹고. 그리고 당분간 주말마다 와서 침 맞고 가세요. 어혈을 풀어야 돼.
초등학생 때부터 아저씨 한의원에 들락날락거리며 때마다 보약을 지어먹었다. 잘 체하는 편이라서 소체환을 항상 챙겨 먹는 편이었다. 근 20년 간 한의원을 다니며 처음으로 아저씨에게 침을 맞았다. 어혈을 풀어야 한다고 부항까지 떴다. 발침을 도와주시는 조무사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내게 피 닦은 티슈를 슬쩍 보여줬다. 이렇게 시꺼먼 피 오랜만에 본다고. 아가씨 마음고생이 심할 때는 한의원 말고 그냥 일 관두고 쉬는 게 최고라며. 사실 내 상황을 모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긴 한데 정말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잠시 상념에 잠겼다. 애초에 회사는 원인도 발단도 이유도 아닌데. 문제는 따로 있는데.
한의원에 갔다가 곧장 부모님 댁에 갔다. 엄마가 해준 된장찌개에 열무김치랑 참기름 조금 넣고 슥슥 비벼 먹었다. 엄마가 뒷마당에서 뜯은 참나물, 아빠가 강원도에서 사 왔다는 가시오가피순에 아빠가 직접 농사지은 더덕구이까지. 엄마는 지난번부터 더덕 타령을 했다. 동의보감 보면 더덕이 우울증에 효능 있다며. 도대체 이런 정보는 어디서 아는 건지 모르겠는데 엄마는 더덕을 산더미처럼 구워놓고 내 밥숟갈 위에 계속 얹었다. 한약이고 우울증 약이고 다 필요 없는데. 사실 엄마 밥이 보약인데. 진짜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 옆에서 집밥 먹으면서 살면 마음이 좀 편해질까 잠시 생각을 했다.
밥을 먹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며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모르는 어떤 아주머니가 날 보며 아는 체를 했다.
- 어머... 저기 큰딸 맞죠? 이번에 시집간?
누군지도 모르는데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아 네에.
- 엄마랑 똑같이 생겨서 바로 알아봤네. 결혼 축하해요~ 신랑이랑 같이 놀러 왔구나? 나 저기 저 집 살아요. 다음에 또 봐요~
나는 여전히 얼굴도 처음 본 어떤 사람에게서 결혼을 축하받는다. '이번에 시집간'이라는 수식어가 다시 내 현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마음을 세게 흔든다. 날씨가 좋아서 저녁에는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온 동네 집집마다 마당에서 바비큐를 하는지 왁자지껄 행복한 소리가 들린다. 엄마 아빠는 자꾸 안에서 먹자고 했다. 뭘 밖에서 먹어. 추운데 안으로 들어와.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엄마 아빠도 밖에서 먹자고 했겠지. 날씨 좋은 봄이면 마당에서 바비큐 하는 걸 좋아했던 가족인데.
저녁에 먹은 고기는 다 체했고 집으로 돌아와서 게워냈다. 그리고 검은 코피를 흘렸다. 몸이 어디까지 망가지고 있는 건지 무섭다. 우울증의 신체화가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러다 정말 큰 병에 걸리면 난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