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혼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내가 이사 온 집의 모든 창은 바다를 향해 나있다. 세 들어 사는 집이라는 이유로 블라인드도 설치 안 했고 심지어 에어컨도 사지 않아서 기록적인 폭염을 선풍기 하나로 버티는 중이다. 세입자라서 돈 아깝다고 커튼도 에어컨도 생략했지만 30만 원을 주고 이 집의 전체 유리창 청소를 맡겼다. 유리창을 닦으니 눈이 시릴 정도로 바다가 더 새파랗게 보인다. 장마가 끝난 뒤 계속되는 무더위가 아침마다 직빵으로 내 몸에 닿는다. 블라인드가 없는 덕분에 원래보다 이른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마주하는 풍경은 햇살이 잘게 부서져서 온 바다가 눈부실 정도로 쉼 없이 반짝이는 것이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에서 당산역으로 건너갈 때 보는 한강의 윤슬보다 몇 배는 더 빛나는 바다의 윤슬은 광채를 그 어떤 것에도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났다.
태생이 까마귀라서 작고 빛나는 보석을 좋아하는 나는 아침마다 개인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한 유럽의 어느 갑부처럼 황홀한 기상을 맞이했다. 나처럼 보석을 좋아하는 여자들은 명품관 근처에 살 게 아니라 바닷가 코앞에 살며 오전 일찍 바다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보는 게 더 행복도가 높을 거란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홍길동을 따라 혈혈단신으로 해외에 간 지 2주 만에 상대방의 변심으로 버림받았고, 그 나라에 가족도 있던 홍길동과 달리 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쭉 혼자다. 나도 엄마 아빠가 있는 한국땅으로 돌아왔지만 이상하게 엄마 아빠에게 의지할 수 없었다.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 선생님은 그걸 나의 K-장녀병이라고 명명하셨다.) 나의 부모는 계속 나를 걱정하느라 매일 같이 전화를 넣었고 가족톡방은 오늘도 활발하게 움직이지만, 갈 곳 잃은 내 마음은 세상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등산화 밑창이 떨어질 정도로 오래 걸어보았지만 답이 쉽게 나오진 않았다.
다친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 사랑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었다. 마음속 깊은 상처가 아물었다는 기준점을 홍길동으로 둔다면 나는 홍길동이 어떻게 살든 상관 않고 오히려 그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이 내 완치에 가깝겠으나, 나는 그를 저주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모든 남자라는 생물들까지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선생님, 저 남혐이 생겼어요. 남자랑은 말도 섞고 싶지 않고 눈도 마주치기 싫어요. 회사에 있는 남자들도 속으로 경멸하고 우스워요. 새로 들어온 직원에게 꼴랑 연애나 결혼 따위나 묻고 관심 보이는 놈들이 너무 같잖고 한심해요. 근데 이런 감정이 올라오는 제가 많이 병들었다는 걸 잘 알겠어요. 상처가 덧나서 우울이랑 뒤엉켜 제 마음이 전부 썩어버린 것 같아요. 사실 잘못한 건 홍길동이지, 다른 남자들은 잘못 없잖아요. 저도 머리로는 알아요. 그냥 마음이 고장 났어요."
서울에 있을 때도 이미 SNS를 지우고 친구들 연락을 끊어내서 혼자였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겠다며 휴대폰 번호도 새로 만들어서 지방 도시의 회사로 이직을 하니 이제야 내가 진심으로 외톨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매 순간 맛보고 있다. 특히나 지방에는 '젊은' 1인 가구를 보기 어려워서 어딜 가나 나만 외계인이 된 기분이다. 서울에서는 혼자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배낭 메고 히말라야도 다녀온 씩씩한 나였는데.
홍길동을 만나기 전에도 혼자서 잘만 살았는데 지방에서는 모든 게 어렵다. 애초에 지방에는 젊은이가 없는 게 제일 낯설다. 지방 도시의 소멸이 뉴스에서만 보던 제목이 아니라 직접 피부로 와닿는다. 단순히 이곳에서 잘 적응해 나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앞으로 긴 인생을 어떻게 혼자서 잘 헤쳐나갈지 솔직히 많이 두렵다. 항상 독립적이고 모험심 넘치는 씩씩한 ‘우리집 큰딸’이었지만 앞으로 한해 한해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이 더 물러지는 건 아닐까. 그 물렁한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필요 없는 갑옷을 지나치게 두껍게 입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서울을 버리고 지방으로 이사한 것인 만큼 나는 요즘 내 인생을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러면 당혹스러운 낯선 감정도 객관적으로 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생긴다. 침착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면서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요즘 나는 "맛있다" 대신 "달지 않다"는 말로 맛있다를 표현한다. 친구들이 주말에 나를 보러 서울에서 놀러 왔는데, 뭘 먹어도 혼자 먹느라 말할 일이 없다가 카페에서 함께 팥빙수를 먹고 갑자기 맛을 표현해야 했다.
"야, 안 달다."
맛있다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면 옛날에 집에 갈 때 엄마 아빠에게도 맛있는 간식을 맛 보여주려고 포장해서 사가면 엄마 아빠는 꼭 이렇게 말했다. "안 다네."
20대에는 디저트가 안 달면 그게 디저튼가 싶었지만, 30대 중반이 되니 나도 모르게 혀 끝에서 단맛을 차단하고 있다. 사용하는 표현에서 시간의 변화를 미세하게 느꼈다. 나는 지금도 이 시간 속에서 조용히 크고 있구나. (내 한 몸 스스로 건사해야 하는 1인 가구인만큼 나는 앞으로 늙고 있다는 표현 대신 쑥쑥 자란다는 표현을 쓰기로 했다. 세련된 마음씨와 젊은 몸뚱이를 유지하는 할머니가 되어야만 혼자인 게 처량하지 않고 오히려 우아하고 깔끔해 보일 테니.)
두 번째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내 생각만큼 독립적이고 씩씩하진 않다는 사실이다. 지구 반대편도 아닌데 고작 작은 땅덩어리 서울에서 차로 몇 시간 거리에 있으면서 지독하게 외로움에 사무친다.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갈무리하다 보면 인간은 정녕 사회적인 동물이 맞다는 확신만 든다.
물론 외롭다고 해서 억지로 새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을 하거나 평생 혼자 사는 게 두렵다고 재혼을 꿈꾸지 않는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내 옆에 다정한 (상상 속의) 남편이 있어도 평생 인간을 따라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외로움을 우울과 혼동하지 않고 철저히 박리해서 내 삶에 도움이 되도록 써먹어야지. 이를 테면 지금 글쓰기 같은 창작 활동말이다.
나는 서울을 떠나면서
조금 더 고독해졌고 조금 더 외로워졌지만
나 자신과 많이 친해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