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괴감이 들어 너무 고통스러워요.
서울에서는 '주재원 간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신혼 연기를 하느라 항상 마음이 허했다. 아무리 선의의 거짓말이어도 매 순간 조마조마했다. 너무 힘들어서 서울을 버리고 지방으로 줄행랑을 치면 조금이라도 나을 줄 알았다. 결심을 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서울에서 나고 공부도 직장도 다 서울에서만 했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연고지도 아닌 곳에 홀연히 나타나니 여기 사람들은 다들 의아해했다. '저 여자는 대체 왜 고향도 아니면서 혼자서 여기에 왔지?'라는 뜻이 담긴 의뭉스러운 눈빛을 보내지는 않았다. 대신 속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놓고 사적 영역을 침범한다는 게 서울과의 차이라면 차이였다.
몇 개의 직장을 거쳤지만 그 누구도, 단 한 명도 내게 연애 중이냐 혹은 남자친구 있냐 물었던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가며 손가락을 헤아려보아도 절대 한 명도 없었다. 함께 프로젝트를 하며 가까워진 동료들과 회식 자리에서 "헤어진 지 꽤 되니깐 요즘 외로운데~" 이런 대화가 나온 끝에 그들의 귀를 타고 건너 건너 아는 사실이면 몰라도, 회사에선 저 사람이 연애 중인지 결혼은 했는지 궁금할 이유도 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회사에 입사 후 몇 달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는 "결혼했어요?" → "연애는 하세요?" → "소개팅할래요?"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개팅 같은 건 안 한다고, 연애 생각 없다고, 남자보다 강아지가 좋다고 말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었다. 결혼 적령기에 돈 잘 버는 미혼이 얼마 없는 지방에서는 틈만 나면 소개팅 주선이 들어왔고,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거절을 해도 연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저 눈이 높아서 상대방이 눈에 차지 않는 거라고 자기들 편할 대로 생각했다. 혹시 이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그럼 저 사람은 어때? 수준으로 계속 모르는 남자들의 사진을 들이밀고 스펙을 읊었다.
적당히 에둘러 거절하면서 알아듣길 바라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지도 모른다. 의도를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상대가 내 속마음을 알아서 정확히 파악해 주길 기대하는 건 어쩌면 초능력일 수 있다.
결국 나는 연애 도대체 왜 안 하냐고, 결혼까진 뭐 그렇다 쳐도 연애 안 하는 건 너무 시간 아깝다고, 예쁘게 생긴 사람이 대체 왜 이 시골 구석까지 온 거냐고 가장 끈질기게 묻던 동료에게 이 상황을 다 털어놓았다.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라포 형성은커녕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고, 단지 회사 동료라는 점말고는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없었다.
적어도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상대방은 크게 당황했지만 애써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사과를 했다.
"우선 미안해요. 알겠어요, 저 다시는 연애나 소개팅 이야기 안 꺼낼게요. 근데 생각보다 서울깍쟁이 아닌가 보네. 저는 연주 씨 외모만 보고 정 없고 도도한 서울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계속 얘기할 때 말끝마다 남편, 시어머니 이런 식으로 지칭하는 거 보고 좀 놀랐어요. 그게 뭐가 남편이고 시어머니예요. 은연주 씨 결혼 생활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잖아요. 신혼이 없었는데 왜 남편이라고 말해요, 전남자친구지. 무슨 시어머니예요. 이거 말도 안 되는 상황이고 믿기지도 않는 이야긴데 이걸 내가 이렇게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게 무례하고 죄스러울 정도네요. 저는 그냥 이제 아무 말 안 하고 연주 씨가 빨리 다시 행복해지길 바랄게요."
그렇게 꼭꼭 숨겨놓고 참아왔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내 불안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고 그날밤부터 몸살을 크게 앓았다. 상대방이 믿을만한 사람이었다면 말한 이후에 덜 괴롭고 조금만 아팠을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서 말한 것 자체를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가지고 사리분별 못하는 치기 어린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괴로움을 허공에 툭 던져서 터뜨려놓으니 이제는 공기를 무겁게 압박하는 그 괴로움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는 생각 또는 다시 여길 떠나 또 어디론가 도망가는 생각을 했다.
신혼을 연기하는 서울도 괴로웠는데, 결혼했냐는 질문에 "혼자 삽니다."라고 얼버무려 대답을 하고는 미혼 흉내를 내는 것은 괴로움이 아닌 처절함에 가까웠다.
처절함은 금세 절망으로 바뀐다. 여전히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이 낯선 동네에서 새로운 사람을, 동성 친구 하나 사귀는 것도 비밀을 갖고선 힘들다. 마음을 열고 진심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 현실에서 제일 아픈 일이다.
지나친 외로움은 나를 어제보다 더 고독하게 만든다.
성난 파도가 유독 시끄러운 밤이다.
곧 10월에 법원에서 홍길동을 만나면 무릎 꿇고 빌어라도 볼까. 그럼 쉽게 이혼해 줄까.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