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사는 이야기: 단순한 시골의 삶
자발적 고립을 통한 주변 정리
시골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이 단순하다. 정교하고 세련된 도시의 것들을 뒤로하고 시골에 이사 와서 처음 느낀 감정은 '매우 투박하고 촌스럽다'였다.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찾아서 내려온 것이니 비하의 의미는 전혀 아니다.
내가 사는 곳은 '군'이 아니라 '시'지만 실제로 사는 동네는 외곽의 '리'느낌이 나는 작은 마을이라서 시골이라고 봐야 될 것 같다. 그래도 다이소도 있고 롯데리아도 있으니 이만하면 살만한 신도시라고 생각했는데 베란다 샷시를 고쳐주러 온 철물점 아저씨가 신도시라는 말에 껄껄껄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가씨 여기 완전 깡시골이죠, 뭐가 신도시예요. 참 긍정적인 분이시네. 신도시는 서울에 붙어있는 곳들이나 신도시지. 여긴 시골 중에서도 더 시골이죠. 저기 시내까지 차 타고 40분이나 걸리잖아요."
평일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다섯 시 반쯤. 강아지를 유치원에서 픽업하고 곧장 바다로 달려 나간다. 해수욕장에 드러누워 파도 소리를 듣는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파도 소리가 적막을 채워준다.
그러고 보니 헤드폰을 안 쓴 지 무려 한 달이 넘었다.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이 필수였던 서울과는 달리 여기서는 파도 소리, 바람 소리만 들어도 충분히 꽉 찬다.
물론 헤드폰을 끼고 일해도 전혀 상관없던 서울 한복판의 IT회사와 달리 지금은 꼰대 문화가 건재한 대기업이라서 일할 때 음악 듣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시켜 먹으려고 배달앱을 켰다. 치킨집 말고는 전무한 메뉴. 내가 있는 곳이 시골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는 순간. 냉장고는 배달앱보다 더 텅텅 비었다. 얼마 전 날 보러 놀러 온 동생이 냉장고 문을 열더니 여기가 호텔이냐고 한소리 했었다. 냉장고에는 생수랑 맥주만 있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근처 식자재마트에 가서 청경채와 알배추, 팽이버섯을 사고 정육 코너에서 샤부샤부용 불고기를 주문한다. 시판용 샤부샤부 육수를 조금 넣고 끓이면 요리가 아니라 조리에 불과해도 맛있는 저녁 한 끼가 완성된다.
단순히 샤부샤부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양념이나 조미료를 쓰면서 복잡하게 차려 먹고 싶지 않다. 퍽 이상한 일이다. 난 원래 요리를 좋아했는데. 서울을 떠난 뒤로 식단도 이곳의 일상처럼 단순해졌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해는 유난히 길다. 아등바등 살아보겠다며 치열하게 야근을 했던 날들이 불과 며칠 전 같은데 여기선 야근이 딱히 없다. 덕분에 샤부샤부를 먹고 설거지까지 다 해도 거실엔 여전히 노을이 길게 들어와 있다. 이케아에서 새로 산 1인용 암체어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계속 바다를 멍하니 바라본다. 명상이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옛날에 요가를 할 때 명상이 제일 어려웠다. '생각을 하지 않는 방법'을 몰랐던 도시인에게 명상은 방법론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였다. 그런데 서울을 떠나 시골에 정착했다고 저절로 바다를 바라보며 명상이 자연스럽게 되는 게 신기했다. 사람은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바다를 계속 보면 우울증에 걸린다던데...' 출처가 불분명한 말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에게 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집을 구했다고 하니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 절반, 바다 오래 보면 우울증 걸린다고 걱정해 주는 사람 절반이었다. 바다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적어도 지금 내게는 무척 필요한 단순함이다. 쓸데없는 걱정일랑 접어두고 실컷 바다를 바라봐야겠다.
공교롭게도 내게 바다를 알려준 홍길동 덕분에 바다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원래 바닷가 사람이었던 것처럼 내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여기에 홍길동과 같이 내려왔다면..' 이런 생각이 한 번도 안 들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건 실재하지 않는 그저 감정에 불과하다. 나는 여기 혼자 내려와 있다. 이혼 소송의 피고가 되어 1심까지 앞둔 상태에 이깟 감정이 올라오는 걸 보면 나는 아직도 내 마음 하나 제대로 못 다스리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이런 감정을 잘 다스리려고 단순해지기 위해서 시골에 내려왔나 보다. 속 시끄러운 감정이 올라올 때는 감정에 끌려가지 말고 파도 소리나 들으면서 어제보다 더 일찍 자자. 필요 없는 것들은 잠결에 파도에 실어 떠나보낼 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