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고 쓸쓸하고 슬픈 나의 요즘
고독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쓸쓸함은 사랑을 약하게 만든다. 슬픔은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거기에 젊음이 더해지면 모든 것이 위태로워진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고등학생 때 나는 제법 감수성이 풍부했던 아이였다.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공부에 집념하지 않았고 책이나 영화, 전시회 같은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허파에 바람 들어가서 쓸데없는 데 신경 쓴다고 싫어했다.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감수성이 덜 풍부했으면 공부 말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쏟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나의 기민한 감성은 다 엄마 아빠에게서 온 흔적이라고 당당하게 받아치며 꿋꿋이 '너무 문제 되지 않을 정도'로만 공부 외의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때는 냉정과 열정 사이가 이미 책으로 히트를 치고 영화까지 인기를 끌고도 한참 지났을 때였다. 서점에 갔다가 냉정과 열정 사이 작가의 최신작이라는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두 권 집고, 제목만 들었던 냉정과 열정 사이까지 총 네 권을 사서 집에 왔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로맨스 소설이나 읽는 고등학생이라니. 그나마 다행인 건 또래보다 성숙한 감수성을 지닌 탓에 막상 연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책을 읽다가 가끔 눈 아프면 만화책을 읽는 정도였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책으로 처음 읽었을 때의 나는 분명 사랑을 믿었다. 베니와 윤오가 제발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한 장 한 장을 넘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거의 20년이 흘러서 드라마로 마주한 TV 속 베니와 윤오, 아니 홍과 준고는 더 이상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실연의 상처에 성격이 조금 어두워진 홍의 모습은 그저 순수해 보이기만 하다. 나도 차라리 저렇게 대책 없이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시니컬한 척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회사에서 내게 다가오는 남자들이 많다. 남녀성비가 맞지 않아서 그렇다고 믿고 싶다. 우리 회사 사내 부부 정도면 둘이 얼마를 버는 것이니 성공이라고 계산기 두드리며 말하는 남자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처음 알았다. 모두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내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에게 일일이 대꾸하는 것조차 지겹다.
그중 한 명은 내게 관심이 있어서 친해지고 싶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나는 그의 돌직구를 가볍게 말아 보이지 않게 쓰레기통으로 집어넣듯 '저는 관심은 없지만 친해지는 건 언제나 환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그 남자는 내게 더 이상 사내 메신저에서 말을 걸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무례할 필요는 없는데 선을 확실히 긋는다는 것이 그만 싸가지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곳에 온 지 이제 3개월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혼자가 익숙하다. 아직 칼퇴는 꿈도 꾸지 못하지만 칼퇴하고 집에 와봤자 할 것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다. 술기운에 내 비밀을 털어놓은 직장 동료와는 그날부터 연락이 끊겼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더 이상 선을 넘지 말라고 일부러 말한 것 같다. 외롭기는 해도 그 마음을 스스로 잘 보듬어주고 있다. 퇴근하면 가볍게 끼니를 때우고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를 본다.
최근에는 1주일에 한 번씩 피부관리를 받으러 다닌다. 서울에 있을 때는 바빠서 결혼식 때도 신부관리니 뭐니 하나도 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여기 온 뒤로 난데없이 피부관리를 받으며 나에게 돈을 펑펑 쓰고 있다.
관리실 원장님은 1주일에 한 번씩 만날 때마다 항상 연애하라고, 결혼 꼭 하라고, 결혼을 적극 권장하신다. 원장님이 깨가 쏟아지는 신혼이라서 그런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나도 이제 비연애-비혼을 외치는 서울깍쟁이 페르소나쯤은 익숙하다. 하지만 오늘은 원장님의 이상형 조사가 꽤나 집요했다. 어쩌면 다음 주에 소개팅 상대를 찾아오거나 이미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남자 얼마쯤 벌면 돼요?"
"저 눈 무지 높아요. 키 크고 잘생기고 돈 잘 벌어야 돼요. 집도 있어야 되고요. 저도 돈 잘 벌어서 굳이 눈 낮추고 싶지 않아요."
하루하루 개소리가 종류별로 늘어난다. 나도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외로워서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기도, 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기도 하다가 갑자기 홍길동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서 이 세상 그 무엇도 믿고 싶지 않아 진다.
확실한 건 로맨스 영화를 보고 가슴이 벅차오르던 감수성 풍부한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