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에서 신혼생활도 살 수 있는 거라면 몰라도
새로 산 침대를 워낙 급하게 주문하느라 꼼꼼히 보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협탁이 세트 구성이었다. 침대는 어차피 남이 눕던 걸 쓰기엔 찝찝하니깐 처음부터 새 걸 샀지만, 협탁은 싸게 사면 좋겠다 싶어서 당근마켓에 키워드 알림을 설정해 뒀다. 며칠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알림이 울렸다. "당근♪" 잽싸게 당근마켓에 들어갔다.
상태 확인 OK
위치 확인 OK
가격 확인 OK
친절한 판매자는 사진을 여러 장 올렸는데,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가격은 새로 사는 거의 반의 반값 수준. 물건은 옆동네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차 타고 20분 정도 걸리는 옆 구에 있었다. 차가 없는 나는 시어머니께 SOS를 외쳤고, 덕분에 구매 예약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판매자 귀가 시간에 맞춰서 밤늦은 시간에 낯선 동네까지 운전해서 가는 시어머니와 (이혼 앞둔) 며느리.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 슬프고 웃기고 부끄럽고 미안하고 화나고 씁쓸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었다. 이게 만약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연기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느 배우가 어떤 표정으로 내 감정을 연기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나이 드신 시어머니께 늦은 밤 초행길 운전을 부탁드린 게 염치없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십 몇만 원 아끼겠다고 괜히 당근마켓 하나 짧은 시간 후회도 했다. 그래도 싸게 샀으니 잘 됐지 뭐, 아낀 돈으로 어머니 맛있는 거 사드려야지. 어머니께 내비게이션 읽어 드리는 와중에도 신호등이 빨간 불에 걸릴 때마다 자꾸 감정이 올라왔다.
높은 매너온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채팅할 때부터 친절했던 판매자는 협탁을 차에 싣는 것까지 도와준다고 미리 주차장에 내려와 있었다. 신혼부부였다. 잠옷 위에 패딩 걸치고 나온 젊은 신혼부부는 서로 사이가 좋아 보였다. 남편 혼자서 잠깐 거래하고 와도 되는 건데 아내까지 같이 나온 걸 보니 확실했다.
남자는 협탁을 대신 차에 실어줬고 여자는 옆에서 주의사항이랑 빠진 게 없는지 한번 더 확인했다. 그들이 다 해서 나는 딱히 할 게 없었다. 차에서 잽싸게 내렸지만 뻘쭘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감사하다고 배꼽인사를 꾸벅하고 차에 다시 탔다. 근데 시어머니의 차가 아파트 주차장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판매자에게 메시지가 왔다.
'여성 두 분이시면 차에서 내릴 때 양쪽에서 같이 잘 잡고 내리셔야 돼요. 이게 무겁기도 무겁고, 서랍장이랑 선반이 드라이버로 고정되어 있는 구조라서 조심히 드셔야 해요. 당연히 남자분과 같이 오시는 줄 알고 걱정 안 했는데 여성 두 분이 오셔서 심히 걱정되네요. 조심히 가세요.'
비참함이 혀끝에서 느껴지듯 입이 바짝 말랐다. 판매자는 그저 친절했을 뿐인데 나는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나도 한국 신혼집을 꾸밀 때 남편이랑 종종 당근으로 물건을 사고팔았었다. 같이 차 타고 가서 새 와인잔을 사 온 적도 있고, 좋아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스툴이나 TV 선반도 싸게 업어왔었다. 우리는 가습기, 모니터, 캡슐커피머신 등을 팔기도 했다. 동네가 동네라서 그런지 물건이 물건이라서 그런지,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거의 비슷한 신혼부부들이었다.
"저 사람들도 신혼부부인가 봐" 남편과 함께 대면거래를 하러 나갈 때마다 멀리서 보이는 커플을 보면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며 반가웠다. 가끔은 따뜻한 판매자로부터 훈훈한 거래 후기를 받을 때도 있었다. '저희 신혼 기간 동안 별 탈 없이 잘 쓴 제품이니깐 행운이 깃들 거예요. 항상 행복하세요'
이제는 그만둬야겠다. 당근도 정말 못해먹겠다. 아직 식탁도 사야 하고 소파도 사야 하지만 더 이상 이런 꼴을 또 보이고 싶지 않다. 차라리 돈 퍼주고 새로 사겠다며 과감히 키워드 알림에서 '식탁'과 '소파'를 지워버렸다.
시어머니랑 둘이서 낑낑대고 짐 나르는 것도 싫고, 물건 팔러 나온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며 나와 비교하는 것도 싫고, 초라한 내 현실을 싫어하는 것도 다 싫다. 나도 신혼인데 도둑맞은 내 신혼은 어디 갔을까. 없는 게 없는 당근마켓에 왜 내 신혼생활은 안 팔까. 차라리 내 인생을 새로 사서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