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힘들었을 때 재생만 해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던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우연히 듣게 됐는데 그때는 하필 내가 살면서 가장 괴롭던 여름이었다. 죽고 싶은 마음을 조심스레 긁어모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
알고리즘이 내 취향을 반영해서 자동으로 저장해 준 오프라인 플레이리스트 중에 하나였다. 비행기 안에서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처음 들었을 때, 마치 이 세상 모든 게 제거되고 나만 동떨어진 것 같았다.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나만 제거됐거나.
유럽으로 가는 15시간의 비행 중 10시간은 이 플레이리스트를 반복 재생하며 계속 울고 또 울었다. 옆자리 승객이 없어서 다행일 정도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도시의 소음,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옆집 강아지가 짖는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 자동차 소리.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죽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영혼이 유체이탈한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영혼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가.
두 발이 딛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분명 순례길을 걷고 있는 건 나인데, 내 두 발이 스스로 걷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누가 대신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죽는 게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다.
완주하고 싶다는 의지도 꿈도 없었다. 마음이 죽어버렸으니 몸도 아팠다. 그래서 순례길은 3일 걷고 때려치웠다. 어차피 삶의 목적을 잃었으니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내 귀에 또렷하게 들린 음악이 바로 이 플레이리스트였다.
제목부터 '마음이 죽은 사람들에게'라니. 내 마음이 정말 죽어버린 걸까. 그래서 이 음악에만 유일하게 반응을 하는 걸까. 이 음악을 만든 사람은 어떤 심정으로 이런 곡을 썼을지 궁금했다. 분명 나보다 먼저 죽어본 사람이겠지.
순례길은 때려치웠으니 그냥 여행이나 하자, 어차피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온 거니 돌아갈 집도 없었다. 코로나 끝나고 정말 오랜만에 간 유럽인데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도 계속 울기만 했다.
낯선 타국의 공원 벤치에서 멍하니 눈물을 삼켰다. 강가를 따라 걷다 보면 반짝이는 윤슬에 내 눈물이라도 섞여 들어간 걸까, 또 주저앉아 울었다. 예쁜 걸 봐도 감흥이 없었다. 유럽의 거리는 작은 골목마저도 온통 사랑하는 연인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는데, 나는 고작 마음이 죽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음악이나 듣고 있는 죽은 마음일 뿐이었다.
원래 즐겨 듣던 음악도, 좋아하던 밴드의 음악도 모두 버겁게만 느껴졌던 시간들이었다. 항상 이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계속 울었다. 곡소리 내며 오열할 때도 많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을 때는 훨씬 더 많았다.
하도 들어서 이 음악을 듣지 않을 때도 귓가에 자동으로 멜로디가 맴돌았고, 나중에는 음악을 듣지 않아도 눈물부터 나왔다. 부서진 내 마음 중 몇 조각들은 이 음악에 가서 박혀버린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 음악을 들어도 더 이상 울지 않는다. 나는 눈물 대신 내가 삼킨 눈물을 글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눈물을 뽑아내듯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서 화면에 토해낸다. 어떤 글은 남편에 대한 연민이, 또 어떤 날에는 남편에 대한 분노와 저주가, 그리움과 과거에 대한 집착, 온화한 내 모습과 미친년이 되어버린 내가 어지럽게 뒤섞여있다.
매일 쓰는 이 모든 글 안에 내 감정이 들어있고, 여전히 내 글은 슬픔을 토해내고 있다. 쓰고 쓰다 보면 언젠가 이 슬픔도 씨가 마르겠지. 그때는 다시 희망을 노래해야지. 죽음 끝에 탄생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