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마음으로
모처럼 금요일에 정시 퇴근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미용실에 갔다.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를 귀 밑 단발로 싹둑 자른 지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 단발머리가 아닌 시절의 내 사진을 보면 다른 사람 같이 낯설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한 달에 평균 1cm씩 자란다고 하니 사실 벌써 가슴팍 정도까지는 자라고도 남았어야 하는 기간이지만 한 번 시작하면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단발지옥.
3주에 한 번씩 머리를 다듬으러 미용실에 가다가 지난겨울이 끝날 무렵 충동적으로 머리를 볶았다. 여성스럽게 치렁치렁 늘어지는 웨이브가 아니라 개성 강한 탱글탱글 파마. 단발머리에 파마까지 하면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머리라고 미용사는 거듭 말렸다.
"그래서 하는 건데요."
당돌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미용사가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아니 왜요? 남자한테 인기 많을 것 같은데. 남자들은 단발까지는 뭐 쏘쏘~ 근데 단발에 파마까지 한다? 그럼 이제 아줌마 머리라고 진짜 싫어해요."
"아 저 남자 귀찮아서 싫어해요. 제발 아무도 절 안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비교적 컬이 강하게 말린 파마머리를 하고 다닌 지 반년. 이번에는 또 충동적으로 머리를 다시 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유는 너무 더워서. 옆 나라의 인공강우 실험이 계속되는 바람에 우리나라의 장마가 실종되고 마른하늘에 폭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체감온도가 40도는 우습게 넘어가자 이 세상 모든 열기가 내 파마머리 컬 사이사이 빈 공간에 들어와서 숨는 기분이었다. 너무 더워서 이 놈의 컬 다 없애버리고 쫙쫙 펴버려야지.
긴 머리 시절에는 미용실 가는 게 연례행사였다. 긴 머리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끝에 조금만 다듬기, 그도 아니면 가끔 C컬로 웨이브 넣기.
단발머리가 된 뒤에는 어쩔 수 없이 미용실에 자주 가야 되는 것도 맞지만, 생각해 보면 일상에 재미가 없어 미용실 가는 게 스케줄의 전부인 것 같기도 하다.
고데기로 머리를 쫙쫙 펴고 나니 거울 속에 단정하게 칼날처럼 떨어지는 똑단발의 내가 있다. 파마 때문에 머리가 더 무거워졌던 것도 아닐 텐데 지금은 한결 더 가벼워진 느낌. 어깨 끝도 괜히 말랑말랑한 기분.
머리를 새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우리 동네가 아닌 것 같다. 머리를 한 게 아니라 마음을 새 걸로 갈아 끼운 효과라도 본 걸까.
여름휴가를 여기로 왔다고 상상하며 천천히 더 먼 길로 돌아서 한참을 걸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조금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지금 겪고 있는 소송도 이렇게 휘리릭 빨리 지나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