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현실
누군가는 약 4개월 만에 신속하게 진행된 우리 부부의 속초살이를 '즉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속초살이를 결심하기까지 가장 중요한 주거환경, 낯선 곳에서의 생업(業), 도시를 떠나 겪게 될 불편함, 우리의 라이프스타일 등 매일 밤 잠들기 전 누워 수많은 상황들을 이야기하며 다양한 시물레이션을 수없이 돌려보았다.
의료환경문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지방이다 보니 도시보다는 열악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아직 둘 다 젊기에 큰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가 생기니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속초에 내려오자마자 우리 부부에게 뜻 밖에 소식이 찾아왔다. 바로 임신이다.
그런데 문제는 2020년 5월 기준, 속초에는 분만 산부인과가 없다는 것이다. ( 24년 5월 현재는 속초의료원에서 분만이 가능하다. ) 임신테스터기를 확인하자마자 속초 내 산부인과에서 정상 임신임을 확인하고는 강릉 산부인과로 진찰 예약을 잡았는데 가장 빠른 진찰 날짜가 한 달 뒤였다.
임신의 기쁨도 잠시, 아기수첩을 받자마자 원인 모를 출혈이 이어졌다. 결국 새벽에 강릉아산병원 응급실까지 다녀온 나는 고위험 산모군으로 분류되었고, 임신기간인 40주 동안 거의 매주 임신 유지와 건강한 출산을 위해 왕복 2시간을 내달렸다.
분만산부인과가 없으니 속초 내 산후조리원이 있을 리 없다. ( 24년 현재, 10월 완공을 목표로 공공산후조리원을 짓고 있다.) 그래서 산후조리원도 강릉에서 이용했는데 조리원에는 강릉, 속초, 태백 지역에서 온 엄마들이 있었다.
내가 조리원에 입소하자마자 한 일은 원활한 모유수유를 위해 오케타니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었다. 내가 속초에서 왔다고 하니 선생님이 당부해 주신 말이 있다. 혹시라도 아이에게 응급상황 발생 시, 무조건 강릉아산병원으로 달려오라는 이야기였다. 내용을 들어보니 강릉아산병원에서 응급실 간호사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속초에서 사고 후, 응급처치 골드타임을 놓쳐 일어난 안타까운 상황들을 너무 많이 봤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래도 병원인데 설마..."란 생각을 했었는데, 실제 겪어보니 지방의 의료환경은 훨씬 열악했다. 의료파업이 아님에도 응급실에서 진료거부를 할 뿐 아니라, 온갖 고생 끝에 아이의 피를 채혈을 했음에도 실수로 검사가 누락되었다고 결과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어린이집에서 학기 초에 제출하는 서류에 "사고 시 응급처치할 병원"으로 가까운 병원이 아닌 강릉아산병원을 적는다.
고위험 산모로 매주 왕복 2시간씩, 속초-강릉 고속도로를 왕복하며 무사히 출산은 했다 쳐도 진짜 문제는 소아과였다.
국가에서 필수로 진행하는 영유아검진을 해주는 소아과가 없다. 기관에 급히 검진결과를 제출해야 하는 경우, 수도권까지 다녀왔다는 글을 맘카페에서 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나는, 지난해부터 매년 1월 1일 소아과 오픈런으로 영유아검진을 예약한다.
이뿐 아니라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니 왜 이리 감기치레는 잦은 지, 아이가 기침이라도 하면 아픈 아이도 안쓰럽지만 병원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더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아이와 서울 시댁에 갔다 갑자기 두드러기가 올라와 근처 소아과에 갔는데 2시간 대기 끝에 3분 진찰 후 약을 받아왔다. "우리나라 저출산 국가라면서요?"
그나마 조금 숨통이 트이는 건 속초의료원에서 분만이 시작된 이후, 속초에서도 소아과 야간 진료가 가능해졌다. 그전까지는 저녁에 아이가 아프면 "밤에 응급실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발만 동동 굴리며 아픈 아이와 자동차 키를 번갈아 바라봤는데 소아과 야간진료가 생기고부터는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사실 병원 진료대기는 소아과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를 가도 상황은 똑같다. 기본 대기시간이 30분 이상이다.
그래도 이제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녀 내 몸이 아프면 등원시간을 틈타 병원 진료를 볼 수 있지만, 그전까지는 타지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롯이 부부 둘이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렇게 몸이 아플 경우에 난감했다. 한 사람에게 맡기고 병원을 가기에는 생업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병원 진료를 다녀오면 반나절이 순식간에 사라지니 말이다.
한 번은 드라마「낭만닥터 김사부」에 나올 법한, 사람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예상했던 데로 대기환자는 별로 없었다.
와 그런데 약국에서 처방전도 키오스크로 접수하는 세상에 차트를 수기로 작성하네? 더 재미있는 건 의사 선생님이 환자를 진료실로 부르지 않고, 대기석에서 환자의 상태만을 듣고 처방전을 주신다. 이유는 모르겠다. 낭만닥터 김사부는 없었지만 병원 분위기만으로는 낭만닥터 김사부 자체였다.
이렇게 상태를 보지도 않고, 듣는 진료를 봤는데도 병원을 다녀와 빠르게 병이 호전된 것도 참 웃긴 이야기다.
의료파업이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요즘 하는 생각은 인생에서 누굴 만나는 가가 중요한 것처럼 병원이 많든 적든, 의사가 많든 적든 나와 잘 맞는 의사를 만나는 것 또한 축복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에서 수기로 차트를 작성해 비웃었지만, 환자의 상태를 멀리서 듣는 것만으로도 연륜을 발휘한 속초의 낭만닥터처럼 말이다.
그 뒤로 나는 이 병원에 단골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