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랫마을 바다 옆 동네
'속초살이'에 아주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겼다면 이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주거지다.
속초는 강원특별자치도 12개의 도시 중 가장 작은 도시로, 작고 작은 땅에서도 면적 대부분에 설악산이 걸쳐 있어 사람이 살 수 있는 실평수는 더 좁은 셈이다. 이 자그마한 땅 안에서 뒤로는 웅장한 설악산을, 앞으로는 광활한 동해바다를 두고 있기에 어쩌면 이것은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라는 명제와도 비슷한 느낌이다. 물론 그 절충지인 구도심 교동이 있긴 하다.
조그마한 지역이지만 산과 바다, 호수를 모두 품고 있는 만큼 각 동네에 특성은 뚜렷하다. 오늘은 4년 동안 내가 만난 속초의 동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속초에서 우리의 첫 번째 주거지는 영랑호 근처의 소형 아파트였다. 야심 차게 속초에 내려오긴 했지만 혹여라도 서울이 그리워지면 언제든 다시 올라가려고 최대한 짐을 줄여 작은 집을 구했다.
영랑호가 근처에 있다 보니 산책하기도 좋고, 특히 아침에 들리는 새소리와 맑은 숲내음은 언제 느껴도 지루함 없이 신선하다.
그런데 웬걸... 속초에 내려오자마자 우리 부부에게 새 식구가 찾아왔다. 결혼 5년 만에 임신을 한 것이다. 특히나 나는 커다란 자궁근종을 갖고 있어 자연임신이 어려울 거라는 난임진단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데에는 아마도 영랑호 산책의 힘이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만큼 속초에 내려와 한 달 정도는 골목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많이 걸었다.
속초의 골목길은 걷는 재미가 있다. 비록 오르락내리락 언덕길이 많아 쉽게 숨이 차오르지만 낮은 담벼락 위로 그려진 벽화는, 돌담 사이에 핀 꽃은, 길 옆으로 무심한 듯 펼쳐진 텃밭은 어렸을 적 내가 살던 골목들을 떠올리게 해 헐떡거리는 숨을 내쉬면서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실제로 산책을 하면 기초체온이 높아져 임신에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근거도 있다. 그렇게 여기서 출산을 하고 2년 살았다. 육아를 하니 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우리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사실 속초에서도 아파트 생활을 하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살고 있는 집만 보면 가끔 내가 서울에 사는지 속초에 사는지 헷갈린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내게 속초감성을 일깨워 준 곳은 영랑호의 작은 골목들이다.
걷다 보면 골목 끝으로 보이는 바다가, 지붕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갑갑한 육아에 숨통을 틔워주었다. 우리 아이는 이 골목에서 걸음마를 배웠고, 자연을 만났다.
속초 도심지를 보면 대한민국 어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크게 구도심과 신도심으로 나뉜다.
속초시청ㆍ중앙시장ㆍ보건소 등 각종 행정기관이 있는 교동과 중앙동이 구도심이라면, 속초시립도서관ㆍ이마트ㆍ다이소 등 생활편의시설과 함께 신규 아파트들이 많이 있는 조양동이 신도심이라 할 수 있다.
새 식구가 생겨 새롭게 찾아온 우리의 새 보금자리는 어쩔 수 없이 병원과 마트, 학교가 모두 모여있는 도심지 교동이다.
아이와 함께 꿈꿔왔던 마당 있는 집에서의 전원생활을 하고파 설악산 아랫마을인 도문동과 설악동도 살펴봤으나, 부동산 사장님이 "내가 딸 같아서 하는 말인데..."라면으로 시작하는 진심 어린 충고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뚜벅이인 상태로 시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육아를 하며 만난 조리원 동기들은 모두 조양동에 살고 있었기에, 비교적 새 도로가 깔리고 생활권이 깨끗한 조양동으로의 이사를 권했다. 또한 '서울시 속초구'라 불릴 정도로 속초의 부동산 시장의 열기가 높고, 부동산을 향후 투자가치로 생각한다면 조양동이 더 나은 선택 지긴 하다.
하지만 왜인지 조양동과 교동,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교동이 더 좋다. 주거에 있어 더 좋은 아파트, 더 깨끗한 동네, 부동산 가치를 생각했다면 속초에 내려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골목 여기저기 낡음 투성이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구멍가게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문방구, 심지어 아직도 모래놀이터가 있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 조차 느껴지는 세월의 향기가 그저 나는 정겨울 뿐이다.
아마도 나는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한 문장처럼, 편리한 곳을 떠나 로맨틱한 장소를 찾기 위해 속초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속초에서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동네는 설악산 아랫마을인 도문동이다.
두 번째 보금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남편과 도문동 곳곳으로 임장을 많이 다녔는데 동네에 높은 건물이라고는 설악산뿐이라 360˚ 동네 어디서도 파노라마뷰로 보이는 산과 옹기종기 세워진 낮은 담벼락이 참 인상 깊었다.
이곳이라면 내가 바라는 전원생활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 만 같다.
봄이면 묘목시장에서 직접 사 온 꽃나무를 심고,
여름에는 무성한 잡초를 제거한 후 마당에 앉아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가을에는 수확한 열매로 이웃과 나누고,
겨울에는 소복이 눈 쌓인 나뭇가지를 그림에 담고 싶다.
만약 남편과 나, 여전히 둘이었다면 이곳에 자리를 잡았겠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이상과 현실이 부딪히는 새로운 영역의 문제다. 전원생활을 꿈꾸지만 아이를 위한 편의시설도 포기 못하는 이중적인 마음...
한때는 출산과 육아로 우리가 원했던 속초살이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아이를 만나서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곳에 더 빨리 마음을 주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독립한 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속초에 살고 있다면 그때는 이곳에 우리만의 집을 짓고 사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
혹시 '속초'하면 동해바다인데 왜 바닷가 마을이 아니고, 산 아랫마을에 살고 싶냐 묻는다면 속초에 바닷가는 항구보다 관광지로 더 유명하기에 조금 소란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나 해수욕장 주변은 밤늦게까지 하는 식당가가 많고, 요즘처럼 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의 주말에는 불꽃놀이 소리가 소음 수준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관광객이 많으니 주차난 또한 배제할 수 없는 문제다. 바닷가 마을의 로망이 있다면 속초보다는 고성을 추천하는 바다.
내가 속초에 내려온 지도 어느덧 4년, 그 짧은 사이 이 작은 지역 곳곳에 대단지 아파트들이 생기면서 정겨운 골목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역특성화를 위해 축제를 열고, 관광객 유치를 위한 상품은 끊임없이 개발하면서 정작 간직해야 할 속초의 아름다움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 겨우 4년 산 내가 느끼는 마음이 이런데 이곳이 고향인 어르신들의 마음은 어떨까?
이건 속초에 문제만이 아니다. 지난해 말, 지역카페에 옆 동네 고성에 무분별한 아파트 개발을 막아달라는 청원 글이 올라왔다. 인구 유치를 위해서라면 아파트가 아니라 병원, 문화시설, 교육기관이 생겨야 신규 유입은 물론, 이미 살고 있는 현지인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걸 막을 텐데 현지인으로서 답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