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2020년 새로 오픈 하는 시립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어. 학생때, 도립병원에서 실습한 적이 있는데, 취약계층환자들이 많았거든. 힘 없고 약한 사람들.. 물론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아프고 힘든건 마찬가지잖아.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더 힘든곳이 병원이 아닐까 싶어. 우리나라는 전국민 의료 보험 제도가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주는건 감사한 일인것 같아. 특히나 기초수급자는 공단에서 100 % 치료비를 지원해주거든.
그런데, 비급여 항목은 환자가 부담해야하는데 초음파나 일부 치료가 비급여 되는 부분들이 있어.
일반 사람들에게는 부담 되지 않을 가격이지만, 그 마저도 부담 되는 분들도 계시잖아.
대학병원에서는 사회복지팀 같은 부서에서 취약 계층을 도와주기도 하는데, 모두 지원 받기는 어렵지. 병원에 안내 도와주는 자원 봉사자 분들도 가끔 마주치는데, 나도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 간호사라는 직업이 내가 원하는 삶에 다가 갈 수 있는 직업인건 맞는것 같아. 하지만 비급여 부분을 설명해야할때는 미안하더라구. 내가 받겠다는것도 아니지만, 뭔가 불편하더라.
그냥 기회가 되면 시립병원 같은데서 사회적 약자에게 더 좋은 간호를 제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어
완전한 개연성은 아니지만 막연히 내가 그 분들을 위해서 도움이 조금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40대가 되서, 시립병원에 취업하려니 ncs(국가직무능력평가시험)도 봤거든. 경력이 몇년차인데 그런 시험을 봐야한다니.. 신선하기도 하더라.
무튼 난 연구간호사로 오랫동안 근무 해서 다시 임상으로 돌아가는것에 대해서 부담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
다행히 입사를 하게 되었고,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어. 전에 병원에 퇴사를 하고 여행을 다녀왔는데, 독감이 돈다는거야. 그게 바로 코로나 였지.
연일 의료진이 고생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때, 입사 예정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 우리 기관도 코로나 병원으로 지정되었다고.. 그래서 근무 가능 여부를 묻는 연락이 왔어. 아이가 아픈 사람이 많으니 엄마가 갔으면 좋겠다고 했어. 아이에게 상황 설명을 했지만 초6이 된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아플때 엄마의능력을 보여주면 좋지 않냐고 말하는거야.
일단은 아들 때문에 가야겠다 싶었지 뭐. 그리고 예전보다 나도 많이 순해졌거든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많이 성격이 둥글 둥글 해졌거든.
뉴스에서 봤을꺼야. 하얀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들. 의료진들.. 그 중 한명이 나였어.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n95 마스크보다 답답한건 언제 치료제가 나올지 모른다는 막연함, 코로나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더 컸던 시간이었어.
내가 근무할때는 몇번 환자 동선 파악 할때였어. 그 사람의 동선은 뉴스에 연일 보도 되었고, 확진자가 다녀간 마트, 식당, 미용실 모두 그 사람의 동선이 확인 되면 문을 며칠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어
음압병동은 창문을 열수 없게 되어있거든. 환자들도 커튼을 치고 있어야 하고 말이야. 그렇게 답답한 상황들은 환자도 지치고 의료진도 지칠수 밖에 없었어.
2주가 지난다고 격리 해제가 되는 시기도 아니었고 음성을 연속 2번 확인 받아야 퇴원이 가능했거든
“환자분 어디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없어” “불편한것 있으시면 콜벨 누르시고 말씀해주세요”나는 혈압을 재면서 환자에게 최대한 다정하게 말해주었어.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친절하게 말하지마 재수없어”
나는 한순간 어안이 벙벙했어. “제가 뭐 기분 나쁘게 말씀 드린게 있나요?”
“날 우습게 보지마. 그렇게 가식적으로 친절한척하지말라고 재수없어”
방호복 속의 나는 온몸이 빨갛게 달아오름을 느꼈지. 갑자기 너무 화가 났어 “친절해서 화가 난다고?”
친절해서 재수없어
환자의 그 말에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고, 갑자기 전투태세로 전환되었지
“특별히 더 친절한건 아니고, 불편한게 있으셨나보네요 푹쉬세요”
환자는 오히려 날 노려보았지 . 이럴땐 피하는게 상책이지. 갑자기 환자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고, 난 자리를 피했어.
처음엔 너무 화가 나서 다른 동료에게 이야기를 했지. 조금 지나서 이성을 찾고 그 환자에 대해서 기억을 했어. 코로나로 가족을 잃고, 그 가족을 만나고 코로나에 걸린거야. 그때 방역당국에선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헀는데 지침도 어긴 분이셨지. 곤란한 상황에 있었고, 그 분은 상황이 여러모로 안좋았어. (자세히 쓸수는 없어 이해해줘) 무튼, 그분이 왜 그런지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구.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그 뾰족한 마음이 타인을 향하게 된것이었지.
그때 생각 났어. 예전 기억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달렸던 그 시간들 말이야.
마음이 가난한사람들을 돌보는건 정말 힘들었어. 나를 내려 놓아야하는데, 난 그게 잘 안돼. 나도 40년 넘게 살다 보니 고집이 보통 쎄진게 아니거든.
그 분이 퇴원하기 전까지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헀고, 그분이 퇴원한 날 병동으로 전화가 한통 왔어
“내가. 말이야. 퇴원했는데, 너희 다 고소할꺼야!” 다짜고짜 이상한 소리를 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나에게 재수없다 한 그 사람이었어.
“의사 바꿔 !! 너랑 말 안해!!”
“규정상 어떤 이유인지 알수 없으면 연결이 어렵습니다 ”
“너구나 재수없는년! 내가 병원장에게 말해서 너 짤라 버리라 할꺼야. 깐죽깐죽 재수없어”
옆자리 동료가 내가 얼굴이 빨개져서 전화를 받으니, 눈짓으로 물었어. “그때 그환자” 입모양으로 말하자 동료가 대신 전화를 받아서 해결했지.
그때 난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어. 그분 때문 만이 아니라 내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도 포용할 수 없는 그릇이 라는 사실이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겐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그냥 보기만 해도 얄미운 존재일수도 있겠더라고
그런데, 내가 버틸수 없다는 판단이 들기도 했고, 아이도 매일 배달 음식으로 떼우는 상황이 마음도 불편했어.
40대 되어 3교대 격리 병동 근무도 혼자서 모든걸 꾸려 나가는 나에겐 부담이 컸지.
다행히 코로나가 좀 잠잠해졌을때 난 퇴사를 할 수 있었고, 다시 연구 간호사 업무를 하게 되었어.
역시 놀던 물이 편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