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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아 May 24. 2024

정신 차려 제발 왜 그러고 살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도와주는 거야

(조금 늦게 돌아오게 되어 심심한 사과를 건넨다. 평소보다 조금 길어졌으니 한 번만 양해해 주면 좋겠다. 오늘은 두 개가 올라가니까.)


예상한 것보다 조금 빨리 내 계획이 실현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그리고 나의 끝날 듯 끝나지 않았던 관계가 끝났다.

사건은 일요일 아침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아침까지만 해도 강릉의 한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복잡하게 얽힌 길들을 헤치고 조식을 전투적으로 먹고 난 후 방으로 돌아와서 힘겹다고 보일 정도로 게슴츠레 뜨고 있던 눈을 의지해 격한 행복을 표현하며 잠옷을 다시 입고는 침구 안에 쏙 들어갔는데, 여자의 감이 있지 않는가. 느낌이 너무 싸했다. 바로 SNS에 들어갔다.


왔다. 와 있었다. 그 끔찍한 이름 세 글자가 다시 보였다. 그런 부탁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오던 그의 말투는 좀 이상했다. 하나밖에 안 와 있어서 미리 보기에 문장이 떴다.


[내가 부탁한 거 생각은 해 봤을까…?]

무슨 낯짝으로 다시 나한테 연락을 하는지 모르겠었다. 그냥 모든 문장에 짧게 답하기로 했다.

또 온다. 또 온다. 또 온다. 계속 온다. 여자 친구 연락도 본인이 너무 안 봐서 알림 안 뜬다고 이틀을 안 봐서 차인 사람이 답이 너무 빠르다. 정확히는 '다음 메시지'가 빠른 거지 답이 아니다. 거의 다 질문이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맞나 싶었는데 맞긴 한가 본지 계속 오는 게 참 박쥐 새끼 한 마리 같다. 계속 편 바꾸고 난리 치다가 결국 아무 데도 안 끼워 주는 애. 모든 문장에 짧게 답해도 지긋지긋하게 계속 오는 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계획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답하고 넘어가다 학교가 끝나면 직접 만나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 관계를 끝내려고 했다. 솔직히 나쁜 말을 뱉어낼 것 같다는 생각도 많았지만 다 지난 지금으로서 생각해 보면 너무 급작스럽게 원하던 사람을 끊어내게 됐던 과거의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을 그를 마지막으로 따뜻하게 안아 주고는 "나랑 인생을 살아가느라 고생했어. 잘 지내."라고 덤덤하게 건네고는 그와의 마지막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추억하게 하려고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무조건 당한 사람이 맞다. 내가 그리워할 때는 갑작스럽게 나를 버리고 여자 친구가 생기고 차이고 짝사랑하는 사람한테 차이고 그게 본인의 욕구든 뭐든 또 뭘 바라서 진작 버린 나에게 와 주었는지. 너무 어이가 없지 않은가.


근데 많은 사람에게 조언을 듣게 되었다. 걔는 한다면 하는 애니까 해코지당할 수도 있다고. 걔 어떤 사람인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냐고. 차라리 지금 너한테 매달리는 상황으로써는 최대한 네가 피해받지 않게 지금 딱 관계를 정리하자. 이런 거였다. 사실 나는 매번 그와 겪은 일들에 대해 그런 얘기들을 들었다. 네가 너무 착하게 잘 받아줬다고. 어찌나 답답했는지 너무 친해서 내 칭찬 한 번 해 주기 오글거려했던 내 친구도 "네가 너무 착해. 왜 그걸 다 받아 주는데. 너 몸 안 사리고 사랑만 해서 되겠냐? 걔 정신머리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차단하고 너 인생 좀 잘 살아. 나 너 쟤랑 살아가는 동안 너 멀쩡한 거 거의 못 봤어."라고 할 정도였다. 내가 그 정도로 호구로 보이긴 했다. 나까지 그래 보이면 멈췄어야 하는데.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본능에 이끌려 사는 짐승 새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멈추기 힘든 일들을 모두 끝내고 겨우 친구로 돌아와서 4개월 동안 잘 살아 놓고? 이제야? 슬슬 나는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 짐승 새끼 같은 짓을 그만해야 한다고. 얘한테 뭐라도 더 줘 봤자 얘랑 나 사이에서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서로를 더욱 신경 쓰게 될 것이다. 행복하려면 나의 계획을 조금 바꿔야 됐다. 계획을 바꾸는 것 자체를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나지만, 이번에는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조건적으로 계획을 바꿔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바뀐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당장 새 계획을 준비했다. 얘는 내가 이렇게 대답하면 이렇게 다시 물어볼 것이고, 그 물음에는 이렇게 답할 거다. 모든 예상이 다 들어맞아서 나는 준비하지도 않은 말들을 모두 쏟아냈다. 내가 준비하지 않은 말은 무조건적으로 그가 열심히 고민하고 쓴 말들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그는 내가 그 말들을 얼마나 고민했는지, 얼마나 대충 끝내고 싶어서 했을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보낸 말들은 엄청나게 길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했어야 하는 조언들을 쏟고 싶었다. 하지만 예전에 만나던 시절의 이야기까지 들먹거리면서 이 관계를 그리 나쁘게 끝내고 싶지도 않았고, 많은 이들이 말해 왔듯이 그저 원래의 나처럼 '착하게' 대처하려 했다. 의도했다기보다는 내 머리에서 나온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모두 그랬다. 그래서 그냥 이번 일로만 말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했다. 이 글을 쓰려고 다시 그와의 대화 내용을 보고 있는데, 정말 나 자신 욕 하나 섞지 않고 누구라도 잘 받아들일 것 같은 조언을 많이 해준 것 같다. 내가 디딤돌이 되어 그가 잘 성장해서 항상 행복한 사랑을 앞으로도 했으면 좋겠어서. (내가 오늘 조금 자만에 빠져 있어도 이해해 주면 좋겠다. 요즘 이 일 때문에 다시 우울증이 시작돼서 자신감이 없는 것 같다.)


[내일 어머니 집에 계시나?]

[응. 그니까 우리 집 앞에서 전화해.]

[아니야. 어머니 계시면 나중에 갈게. 집에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왜 또 온다고 해 놓고 나중에 온대. 난 빨리 얘기하고 끝내고 싶은데.]

[그냥 지금 얘기하면 안 돼? 뭐가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데...]

하, 나는 이 답을 보고 직감했다. 지금이다.


[그럼 그냥 지금 얘기할게.]

[우리 한 번 이러고도 친구로 못 지낼 것 같다. 난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다시 이러니까 당황해서 받아줘 버렸고 나중에 또 거절하니까 원래는 하지도 않던 애원을 하는 네가 너무 원망스럽고 미웠고 갑자기 혐오감이 드는 것 같기도 했어.]

[그냥 원래도 너 자체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돼서 더 싫고 특히나 내 사고 안에서 이성 친구라는 정의의 특성상 어떤 말을 해도 토 나올 것 같은 게 이성이야. 그니까 받아들여 주면 좋겠다.]

[나는 사실 네가 뇌가 있는 한 생각을 좀 하고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거 너 인생이고 다시 시작하는 거 없잖아. 안 그래?]

[말하지 말라고 하고 나에 대한 소문만 이상하게 내놔서 내가 말해 봤자 애들은 너 이러는 것도 안 믿거나 모를 거고. 그래서 나는 그냥 너 이미지만 챙기는 걸로 보이는데.]

[너 이러면 밴드부 퇴출 될 수도 있는 거 아는 거 아니야?]

[정신 차려.]

[아 그리고 네가 좋아하던 걔. 들었는데 네가 연락하고 말 걸고 살짝 닿는 것마다 역겨워한다고 하더라. 내가 직접 들었으니까 말 안 해도 알겠지.]

[솔직히 얘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는데 이 얘기하려고 얘기했어. 나도 걔랑 똑같아지려고.]

[우리 그냥 원래 그래야 했던 것처럼 손절하자 이제.]

[난 이런 얘기하는 사람이랑 더 이상 친구 못 할 것 같아. 미안해.]

한 번에 보내지도 않고 생각 나는 대로 막 보냈다. 나쁘지 않았지만, 손절하려는 의도의 모든 말들을 다 꺼내고도 나는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그에게 온 답장은 간단했다.

[알겠어.]

솔직히 받아들일 만한 말들이라 본인도 받아들인 것 같다. 다행이다. 아직 내가 한 맞는 말은 잘 받아주는 거 그대로여서. 이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인생 잘 살게 도와주는 거라는 걸 빨리 알아채 줘서. 이제 내가 더 이상 너 따위한테 휘둘리는 호구가 아니란 걸 알아줘서. 그리고 나는 그의 번호를 차단하고, 삭제했다. 그다음으로는 카카오톡, 각종 SNS 계정들, 부계정들. 모두 차단하자 마음이 편했다. 내가 도대체 뭘 했다고 이렇게 힘들어 죽을 것 같았는지 싶었던 내 의문들이 답이 없는데도 그냥 싹 쓸어져 나갔다. 이제 이렇게 힘들 일이 없었다. 모든 걸 끝내자 후련했다. 행복해서 소리를 지르며 친구와 통화를 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부모님께 달려가 펑펑 울었다. 내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던 그와의 기억들을 지울 명분이 확실해져서.


그리고 다시 만난 나와 그의 길고 불 같았던 1년이 끝났다. 지금 잘 살고 있겠지. 비록 나의 인생에서는 가장 악역으로 보이던 인물이었지만, 실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직 우리 모두는 어리고 사람이니까. 이 일을 필두로 그가 진정한 그를 찾으며 성장하면 좋겠다.


이 글을 빌려 그에게 간접적으로 전해 본다. 잘 살아. 내 인생에서 나타나서 내가 성장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 이번에 네가 겪은 일은 그냥 네가 나처럼 나로 인해 성장할 기회로써 일어난 일이야. 너무 혼란스러워하지 말고 진정한 어른으로 잘 성장해 나가자 우리. 많이 행복했고 많이 울며 첫 번째 사랑의 추억을 쌓았던 우리를 돌아보며 웃고 얘기할 수 있는 좋은 서로가 되자. 모든 첫사랑은 그런 거니까.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마지막으로, 네가 내 인생에 존재해 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도, 많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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