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독립문제가 깊이 연계된 현대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매우 중요한 회의 중 하나가 바로 포츠담회담(Potsdam Conference)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열린 마지막 회합이자, 전후 전개될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회의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초토화된 유럽은 1945년 5월부터 휴전에 들어가고, 그해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당시 세계 3대 초강대국이었던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수뇌부가 이곳에 모여 지구상 모든 분쟁지역에 대한 협의를 하게 되는데 바로 그 회의가 포츠담회담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와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저절로 들게 하는 현장이다.
포츠담회담이 열린 장소는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체칠리안호프 궁전(Cecilienhof Palace)이다. *독일어 Hof는 안마당이 있는 궁궐이나 대저택에 사용되는 단어다.
영국 처칠 수상, 미국 투루먼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1945 포츠담회담 책이 독일어 및 영어버전으로 판매된다.
중요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Q. 포츠담회의는 왜 독일 체칠리엔호프 궁전으로 결정됐을까?
A.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책임자에 대한 反히틀러 연합군의 응징의 상징성으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결정되고, 독일의 대부분이 파괴된 가운데 그나마 심각한 폭격을 피한 곳 중 3국 대표단이 거주하면서 회담을 열 수 있는 대형 건물이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Q. 전쟁 막바지에 독일은 거의 다 망했다. 그런데 장소는 독일이다. 그러면 회담 조직과 보급상의 준비는 누가 주축이 되어 준비를 했을까?
A. 포츠담은 당시 소련 점령지에 속했다. 그래서 포츠담 회담은 소련연방군의 지휘 아래 준비되었다. 파괴된 도로를 다시 깔고, 수도와 전기공사가 진행됐으며 회담장소 옆 포츠담공원에도 새로 나무를 심었다.
회담 당시에는 3개국이 3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자의 경비를 담당했다. 그래서 3국 수뇌부는 서로 다른 장소의 입구를 통해 회담 장소로 이동했고, 대표단의 식사도 회담개최 시 소련이 준비한 뷔페를 제외하고 각국이 알아서 준비했다.
역사적인 회담장
원탁 의자를 자세히 보면 처칠, 트루먼, 스탈린이 앉은 3개의 의자는 다른 의자보다 등받이 높이가 높다.
벽에 3국의 국기가 걸려있다.
포츠담 회담이 열린 이곳이 소련 점령지에 속해 소련국기가 가운데 걸렸다.
<3국 수뇌부 집무실>
회담장을 중심으로 스탈린, 처칠, 트루먼의 집무실이 하나씩 있다.
소련 스탈란 집무실
영국 처칠 집무실
미국 트루먼 집무실
회담장 바깥. 유리창 안쪽이 회담장이다.
<영국학생들의 현장 역사교육>
회담장 입구에 한 무리의 중고등 학생들과 어른이 몇 명 있었다. 궁금해서 사진 가운데 손가락으로 뭔가 지시하는 분에게 다가가서 물어보니 영국에서 왔다고 했다.
중요한 역사를 공부하러 영국에서 독일로 역사적인 회담 현장에 온 것이다. 실제 회담장 안에서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아래와 같이 여러 번 눈에 띄었다.
"영국에서 독일은 가깝잖아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일본에 가서 이런 역사 교육을 하지 않을까?
나이 50이 넘은 나도 인류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오니 이렇게 마음이 뭉클하고 느낌이 다른데 자라나는 우리 다음세대 청년들은 인생을 다르게 느끼게 되지 않을까?
역사교육은 현장에서 배우는 교육효과가 책을 읽고 머리에 넣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장 좋기는 책으로 먼저 공부하고 역사 현장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단채 신채호 선생의 말이라고도 하고 처칠 수상의 말이라고도 하는 표현이 기억난다.
역사를 잊은 국민에게 미래는 없다.
[토론할 질문들]
1. 포츠담회담은 왜 열리게 됐는가?
2. 회담 당시 3대 강대국은 어디인가? 지금의 3대 강대국은 어디인가? 이러한 강대국의 변화는 왜 생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