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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Apr 05. 2024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르네 마그리트, 데칼코마니아, 1966

 

왼쪽에 중절모를 쓴 남자의 뒷모습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오른쪽에 왼쪽 남자와 외형이 똑같은 공간이 있다. 마치 그 남자가 있다가 쏙 빠져나간 자리 같다. 커튼이 저렇게 재단되었을 리는 없고... 저런 모양의 창문이 있는 걸까? 또 왼쪽의 중년 남자가 사라지면 오른쪽과 똑같은 하늘과 구름이 있어야 당연할 텐데, 과연 그럴까? 거기에는 비가 오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밖이 보이지 않고 벽이나 커튼으로 가려져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과연 지금 보는 장면이 사실일까?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는 20세기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벨기에의 화가다. 그의 작품은 익숙한 일상적인 물체를 비현실적이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표현하여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이 작품 ‘데칼코마니아(Decalcomania)’에는 데칼코마니 기법을 사용해서 현실의 물체와 풍경을 변형시켰다. 그 의도는 사물의 본질과 인식의 한계, 현실과 이미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환상이 실제를 대신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실제가 아닌 환상에 재화를 지급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태국이나 프랑스에 온 것 같은 식당에 가고, 비행기에 탄 분위기가 나는 카페에 간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분장하고 사진을 찍는 포토존도 인기다.     


또 으리으리한 양반댁 같은 한식당에 갔다고 상상해 보자. 놋쇠 그릇에 정갈하게 담은 음식이 나오고, 한복을 입은 고운 아주머니들이 정성스럽게 음식을 설명하고 간다. 이미 먹기도 전에 이 음식들은 정성스럽게 만들었고 맛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생겼다.      


미술사를 공부하다가 프랑스의 철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여기에 '시라시옹'과 '시물라크르'라는 개념이 나온다. 


시뮬라시옹은 현실을 모방하는 과정을 넘어, 그 모방이 현실 자체를 대체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모방된 현실에 의존하며, 이러한 시뮬라시옹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시뮬라크르는 현실을 대표하는 모방물이나 상징물을 의미하며, 원본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독립적인 실체로 기능한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가 단순한 복제를 넘어서, 현실을 대체하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원본 개념이 사라지고, 대신에 모방물만 남게 되어,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했다. 80년대 초에 주장한 개념이지만 지금 상황에도 딱 들어맞는다.       


예전에는 물건이 품질이 좋으면 잘 팔리고, 음식이 맛있으면 손님이 많이 온다는 말이 당연했다. 본질만 충실하면 나머지 부분은 부수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거기에 환상을 더해야 한다. 식당에서는 사진을 찍으면 예쁘게 보이는 음식을 내놓아야 하고, 영상에 아름답게 나오는 장소여야 사람이 몰린다. 맛있게 먹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먹는다. 실제 모습보다 사진 속의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고 여기고, 사진에 포토샵 작업은 기본이다.


이처럼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고,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 내 감각을 통해 느끼고 경험을 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환상은 사전에 현실이 아닌 헛된 공상이나 상상이라고 나오지만, 그 영향력을 확장해 현실을 대체하는 가치를 얻었다.

앞으로 이 환상이 현실을 어디까지 침범하고 대체할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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