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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Dec 29. 2023

관계의 중력 속에 살지만

에드바르 뭉크, 생명의 춤, 1899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파티가 열리고 있다. 하늘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저녁 무렵인 듯하다. 남녀가 쌍을 이루어 춤추고, 파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다. 그런데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는 여인들은 그 분위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춤추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두 손을 조심스럽게 모으고 서서 분위기에 섞이지 못해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운데 두 남녀는 서로 바라보며 붙어 춤을 추고 있지만, 그 표정이 즐겁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 작품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생의 프리즈’ 연작 중 하나인 ‘생명의 춤(Dance of Life)이다.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가 병으로 사망했고, 다른 가족들도 먼저 죽거나 정신병을 앓았다. 아버지는 신앙에 광적으로 집착해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뭉크의 작품 전반에는 죽음과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는 ‘공포 슬픔, 그리고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옆에 서 있었다’라고 직접 서술하기도 했다.     


이 생명의 춤은 노르웨이 오슬로 아스가르드스트랜드의 어느 여름날 밤의 한 장면이다. 당시 뭉크는 상징주의 심취되어 있었다. 그래서 작품 속 인물과 색깔은 상징성이 강한 편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젊음, 관능, 고통을 상징하며, 젊음부터 노년까지의 삶의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또 붉은색은 사랑과 열정, 흰색은 순결과 환희, 검은색은 고독과 죽음 등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는 이런 미술사적인 의미를 전혀 몰랐다. 그냥 작품 속 인물들이 세상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가운데 두 사람은 함께 춤을 추고 있지만,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혼자 서 있는 두 여인은 흥겨운 파티에 동참하지 못하고 불편해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 작품 속 춤추는 행위는 부단히 변화하는 인생의 많은 관계를 상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마음고생을 톡톡히 했다. 그 바람에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관계가 생성한 태풍을 피하는 것만 고민했다.


그런 영향인지 자라면서 다른 사람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누군가와 관계가 깊어지면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다른 인연이 생기게 마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연은 또 내가 피할 수 없는 태풍을 만들지도 몰랐다.     


결국,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편을 택했다. 타고난 인연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내가 맺고 끊을 수 있는 관계는 내 의지에 따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뜻대로 지낼 수 있었다. 혼자라도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고 편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생각처럼 관계에서 벗어나기가 참 쉽지 않았다. 아니, 어디 산골에 틀어박혀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혼자 버티기는 불가능했다. 또 불편한 일은 줄었지만 좋은 일, 기쁜 일도 별로 생기지 않았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다시 교류의 빗장을 열었다. 관계를 맺고, 이어가고, 상처받고, 극복하는 과정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고 관계와 밀당을 시작했다. 관계 속에 있되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사물이나 물질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존재는 대상이 있을 때 의미가 되며, 각자 따로 떨어진 존재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관계를 맺을 때 의미가 생성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지구에 살며 중력을 거스를 수 없듯 이 세상에 살면서 관계를 거부할 수 없다. 인간은 관계의 중력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진정한 나를 찾는 일은 관계를 떠나 온전히 나 혼자일 때 가능하다. 관계가 부여하는 나의 위치, 역할에서 벗어나 단 하나의 우주로서 나를 면밀히 들여다볼 때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관계의 중력에서 벗어나 무중력 상태로 나의 우주를 유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관계와 나, 중력과 무중력, 그 사이를 넘나 들며 내 위치를 찾아가는 노력을 이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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