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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즐 Jan 21. 2024

개념과 본질의 숨바꼭질

로버트 인디애나, Heliotherapy Love, 1995


강렬한 빨간색으로 인쇄하듯 그려낸 L, O, V, E 넉 자. 마치 사랑이 넘쳐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표현한 듯하다. 또 삭막한 세상에 대고 사랑하라고 크게 외치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 정사각형 격자 안에 글씨를 가두어 놓은 것은 그 뜨거운 사랑에도 이성의 끈은 놓지 않으려는 냉정함을 녹여낸 게 아닐까 상상해 본다.         

  



미국 팝아트의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1928~2018)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단순하고 간단한 패턴과 색을 사용해 강력한 의미를 전달한다. 

‘LOVE’는 처음에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크리스마스 카드 제작을 의뢰받아 탄생했다. 그 후 큰 인기를 끌어 회화, 판화, 반지, 우표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그의 LOVE 조형물은 전 세계 도시 수십 군데에 설치되어 있고, 우리나라도 서울과 인천에 있다. 이후 ‘HOPE’ 작품은 미국 대선 때 오바마 후보 지지 캠페인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는 1970년대 메인주 바이널헤이븐의 외딴섬으로 이주해 남은 생을 보냈으며, 말년에는 예술계와 교류도 거의 하지 않고 인터뷰도 피했다. 문자를 통한 강력한 소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작가가 마지막에는 자기만의 세상으로 들어갔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사춘기 청소년들을 ‘중2병’에 걸렸다고 표현한다. 그들은 소위 반항과 방황의 아이콘이다. 주위 사람들은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겪고 있는 그들을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무난하고 순하게 그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마저도 일부러 사춘기다운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사춘기인 내가 좀 삐딱해져도 되고 그냥 아무 일에나 예민하게 굴어도 될 것 같다. 그래도 주위 사람은 어떻게 해도 이해하고 넘어가 줘야 한다. 나는 중2병이니까. 그런 때는 다 그런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진짜 사춘기의 고민과 방황 때문인지 참을 수 있는 일에도 화를 내면서 중2병이라는 단어에 숨는 건지 자신은 알고 있다.      


중2병, 갱년기, MZ세대 등과 같이 같은 시기를 보내거나 비슷한 특징이 있는 무리를 지칭하는 단어들이 있다. 그런데 종종 그 단어에 스스로 갇혀 버린다. 그 단어에 기대어 내면을 다듬고, 고통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외면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마치 특권을 누리는 듯한 기분으로 불편한 상황을 편하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함정과 같다.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불편함을 참아내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잠재우고, 아픔을 이겨내는 힘이 점차 약해지고 만다.     


예전에는 ‘남자’라는 말에 갇혀 슬퍼도 울지 못했고, ‘여자’라는 단어에 묶여 얌전하고 조신하게 행동해야 했다. 사람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대로 갇혀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세상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이'라도 예절과 규율을 지키는 습관을 키워야 하고, '어른'이라도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개념이라는 방패 뒤에 숨거나 귀찮다고 피하지 말고,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는 노력을 이어간다면, 세상이 한 단어로 나를 정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상이 정한 개념, 프레임에 나를 가두어 두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진짜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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