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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즐 Feb 22. 2024

영웅을 기다리며

자크 루이 데이비드,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801


힘찬 기세로 앞발을 들고 있는 백마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박차고 나갈 것 같다.  화려한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는 그 말을 제압하면서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다. 강렬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함께 저 산을 넘어가자고 독려하는 것 같다. 산세는 험하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폭우가 내릴 듯 어둡지만  이 남자는 그 무엇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마치 고대신화 속 전쟁의 신이라도 된 듯이 위풍당당하다.     

      



자크 루이 데이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는 18세기 후반부와 19세기 초에 유럽 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프랑스 신고전파인 화가다. 프랑스혁명과 이어지는 나폴레옹 시대의 이상을 반영하며 유럽 미술계에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고대 역사와 신화에 영감을 바탕으로 했으며, 당시의 정치적 주제를 반영했다. 


그는 혁명당원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해 투옥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를 맺어 궁정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그 역시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다비드는 선명한 색채를 사용한 화려한 그림을 그렸고, 주제 또한 주로 신화와 초상화를 택했다.           


이 작품은 1800년에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하려고 알프스를 넘는 장면을 묘사했다. 한때 국산 양주 캡틴 큐에 이 이미지를 사용해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졌다.  


그림 속 나폴레옹은 ‘내가 바로 영웅이다’라고 외치고 있으나 당시 실제 이야기는 다르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현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노새를 타고 갔다고 한다. 또 붉은 망토를 두른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전쟁에 지친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진실이야 어떻든 다비드의 이 작품 자체는 이상적인 고전미를 구현했으며 균형 잡힌 구조를 자랑하는 수작이다.





옛날에는 전쟁이 없고, 먹을 것이 풍족하면 그것이 바로 태평성세였다. 그러나 실상은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하고, 전쟁도 자주 일어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영웅이었다.


방향을 잃은 백성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명군이 있었고, 도탄에 빠진 군사들에게 용기를 주는 장군이 있었다. 혜성처럼 나타나 위태롭던 나라를 지켜낸 영웅은 백성들에게 생존의 횃불이었다.     


20세기 초, 전 세계를 포연으로 가득 채운 두 차례의 전쟁이 발발했고, 승자도 패자도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이를 마지막으로 세계가 함께 전쟁에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안전하고 평화로운 풍요의 시대가 펼쳐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먹고살 만해지니, 칭송하고 우러러볼 수 있는 영웅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일까. 풍요롭고 평온한 시대에는 영웅이 나오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현재는 영웅이 필요 없는 시대인가.      


이전에는 다수가 간절히 소망하는 가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이가 영웅이었다. 전쟁에서는 승리를 쟁취하면 영웅이 되었다. 타국의 억압을 받을 때는 독립운동에 몸을 실으면 영웅이 되었다. 군부 독재 때는 민주화의 깃발을 들고 달리면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살아남으려고, 잘 먹고, 잘살려고 한 방향만 보고 달리던 시절은 지나갔다. 사회는 점점 더 세분되고, 사는 모습이 너무나 다양해졌으며, 새로운 가치가 등장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영웅이 나타나야 모든 이를 아우르고 만족시킬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해 보면 세상이 바뀐 만큼 영웅도 변해야 할 것도 같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영웅은 예전처럼 강력한 카리스마와 냉철한 통찰력, 철인다운 면모를 지닌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잘 듣는 귀와 잘 살피는 눈, 잘 포용하는 가슴이 있는 영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영웅은 사람들을 한 길로 끌어모으기보다 두루 평안한 길을 찾는 지혜를 갖추었으면 좋겠다.      


어두울 때 별이 빛난다고 했던가. 

이 시대의 어둠을 따뜻하게 보듬어줄 영웅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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