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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Dec 25. 2023

당신도 전쟁 중인가요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목표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동물과 사람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모두 괴로운 듯 울부짖고 있다. 가운데 말은 등에 단검이 꽂힌 채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르고, 말발굽 아래는 남자가 쓰러져 있다. 남자 주위에는 떨어져 나간 사지가 널려 있고, 주인 잃은 팔은 아직 부러진 검을 쥐고 있다. 오른쪽 여인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고 화염이 이는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려 하지만 여의치 않은 것 같다. 왼쪽 여인은 이미 죽은 듯 고개가 축 늘어진 아이를 품에 안고 절규한다. 흑백 작품이지만, 화면은 온통 핏빛으로 물든 듯 처참하기만 한 광경이다.

           



작품 제목은 ‘게르니카(Guernica)’로 스페인의 지역명이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때 독일군은 24대의 비행기를 동원해 이 지역을 폭격했는데 수백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그 참혹한 상황을 고발하고 형상화한 것이 이 작품이다. 크기가 무려 세로 349.3cm, 가로 776.6cm나 되는 수작은 전쟁의 참상을 입체주의적 기법으로 표현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역사상 전쟁이 없는 시대는 없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진행 중이다. 특히 세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때가 있었으니, 제1, 2차 세계대전이었다. 우리나라도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겪었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정치, 경제, 문화, 생활 등 영향을 받지 않는 분야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생존 그 자체다. 죽느냐 사느냐가 삶의 첫 번째 목표가 된다. 일단 살아남아야 다른 문제도 고민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 만연한 죽음과 황폐해진 생활, 살육을 위한 기술 발전, 미래에 대한 막연함이 극에 달했다. 전쟁으로 야기된 인간 소외가 날로 심각해졌고, 사람들은 절망과 불안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실존철학이 급부상했다. 생명이 가장 가치가 없어진 시대에 역설적으로 존재에 대해 활발한 성찰이 일어났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당연히 재건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이후 국민 대다수는 ‘먹고살 걱정’이 끝이 없었다. 나라 전체가 가난했고, 먹을 것 자체가 부족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사람들의 목표였다. 너나 할 것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잠을 줄여가며 일하고 또 일했다. 내 자식들, 내 후손들에게는 이 가난과 배고픔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지금은 어떤가.

옛날과 비교하면 참으로 풍족한 세상이 되었다. 음식은 생존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미식의 대상이 되었으며, 옷 역시 패션과 감각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공동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개인의 이익과 취향을 우선으로 삼아, 각자 다양한 삶의 목표를 위해 살고 있다. 또 전에는 ‘틀린 것’이었던 가치들이 ‘다른 것’으로 인정받으며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있다. 참으로 자유롭고 화려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먹고살 만해졌으니 정말 전쟁은 끝났는가. 




이제는 치열해진 경쟁에서 앞서가고 세분된 사회 구조 속에서 성공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모두 고군분투하고 있다. 또 다른 생존 전쟁이 펼쳐진 것이다.  무기로 무장한 적군은 아니지만 나의 경쟁자들은 적이나 다름없다. 갑작스러운 폭격의 공포에 떨지는 않아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경제 위기나 기상이변, 팬데믹 등에 영향을 받는다. 게다가 숨 가쁘게 변하는 기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바로 낙오되고 만다.      


그래서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비일비재하고,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돌이켜보면, 전쟁에서 중요한 점은 승리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었다. 존재 그 자체가 목표라는 뜻이다. 


요즘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슬픈 선택을 하는 이유는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 아닌 것 같다. 너무 정신없이 전투에만 몰두하다 진정으로 자기가 존재할 이유와 목적을 잃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삶이 전쟁과 다름없다면 실존하는 것,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다. 

살아 있어야, 그래야 다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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