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심리학을 통해 보는 아픈 기억들과 자아의 가면
내성적이고 조용했지만,
깊은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였던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테다.
당시 한 친구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우리는 고민을 나누고, 집에 놀러 가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서로만의 1:1 교환일기장을 쓰기로 약속했다.
그 시절에는 절친한 친구끼리 비밀스럽게 교환일기를 주고받는 문화가 유행이었다.
서로를 '절친'이라 믿었던 우리는 매일 일기를 통해 마음을 나누며 우정을 쌓아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산산이 무너졌다.
갑자기 어느 날 그 친구가 내 동의도 없이 교환일기 내용을 방과 후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 앞에서 공개했다.
그리고 농담처럼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난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아이는 그런 날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넌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난 널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끝난 순간, 소중하고 깊었던 그 아이에 대한 마음마저 끝났다.
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에 들고 있던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울며 교실을 뛰쳐나왔고 그 이후에는 기억이 정확하게 나진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저 그날의 기억은 어린 나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고 내게 씻기지 않는 기억의 잔흔을 남겼다.
'대체 타인에게 내 마음을 어디까지 보여줘야, 덜 다치게 될까.'
그렇게 내가 '가면'을 알게 된 첫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기억은, 어른이 된 지금도 꺼내기엔 여전히 불편하고 아픈 기억이다.
분명한 건 이 상처는,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점점 더 단단한 가면을 쓰게 만든 첫 시작점이기도 했다.
이런 상처들은, 종종 우리가 쓰는 가면을 더 두껍고 단단하게 만들어간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혹은 다시는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점점 더 사회적 가면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형성된 우리의 '사회적 자아의 가면'을 부르는 분석심리학 용어가 있다.
바로 페르소나(Persona)다.
페르소나는 원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배우들이 연극할 때 사용한 가면에서 유래한 말이다.
칼 융(Carl Jung)의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소나는 우리가 외부 세계에 보여주는 자아의 '가면'이다.
이는 의식의 주체인 자아가 사회와 관계를 맺기 위해 외부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님, 부모, 회사원, 친구처럼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페르소나를 자연스럽게 쓰게 된다.
융은 이 페르소나가 오랜 진화 과정 속에서 인류가 사회적 동물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무의식적 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페르소나를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정신구조 중 하나로 설명했다. 이 안에는 인류 전체의 경험과 사고에 바탕을 둔 원형(archetype), 원시적인 감정과 공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쉽게 말해, 한 번도 천둥번개에 맞아본 적이 없어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에 놀라고 두려움을 느낀다.
이는 인류 조상이 오랜 세월 동안 자연재해를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해 온 집단적 경험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걸 집단 무의식이라 한다. 이처럼 집단 무의식은 우리가 개인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전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심리 구조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르소나는 단순한 위선이나 자기부정이 아니다.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자신을 보호하며, 안정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심리적 장치다.
문제는, 이 가면이 너무 두꺼워지거나 자기 자신과 동일시될 때 생긴다.
자신의 의지보다는 부모, 사회, 타인의 기대에 따라 사는 삶 속에서, 주체성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리고 타인의 기대에 맞춘 모습이, 사람들과 마음을 거리 두고 살아가는 자신이, 마치 원래 자기인 줄 알고 점점 자신의 감정, 욕구, 가치 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문득 이런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지금, 건강하게 페르소나를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참 자기를 잃어버린 채 사회적 역할만을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나 역시 나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온전히 안아준 사람은 아니다.
상담을 그저 배우고 학습하는 것과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여전히 안아주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사람이다.
상담학을 공부하며, 청년들과 청소년들의 과도기 과업을 현장에서 다룰 수 있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 과정은 거울이 되어 내 지난날을 비췄다.
그 아이들의 고민 속에서, 왜 내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오게 되었는지를 거꾸로 되짚어보게 되었다.
도망치고 싶었던 선택 앞에서 두려운 척하지 않던 내 모습.
상처받기 싫어서 먼저 사람들을 밀어내던 내 모습
사회 속에서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애썼던 내 모습.
무리에 섞이기 위해 억지로 외향적이려고 노력하던 내 모습.
그렇게 내 모습들을 돌아보니 페르소나와 나와의 동일시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면에 의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꽤 슬픈 마음이 들곤 한다.
이렇게까지 사회 속에서 나를 잃어가며 굳이 애썼나 싶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른 이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기 위해서,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나는, 그런 내 모습을 이해하는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중이다.
정말인지, 한층 더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는 건 기쁜 일만은 아니다. 얼마나 못난 나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보려고 애썼던 나인가.
페르소나를 떠올리며 상처받지 않으려 먼저 등을 돌리던 날들, 누군가의 인정을 갈망하던 순간들,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애써 밝게 웃던 내 모습들도 교차된다.
오늘 나는 그런 나에게 작은 연습을 하나 더해본다. 조금만 더 너그러워지기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안아보는 법을 다시 배워가기로.
"애썼어. 잘해왔어. 지금껏 잘 버텨줘서 고마워.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나는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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