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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담 Mar 19. 2024

07. 부모님도 독립이 필요하다

새로 이사 갈 집의 입주가 가까워져 본가에서 짐을 싸던 어느 날이었다. 옷, 화장품, 책 등 거실은 내 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한 것은 옷이었다. 옷장에 있던 겨울 옷들을 다 빼서 리빙박스에 담고, 구석에 정리해놨던 여름옷들을 꺼내 내 옷을 골라내고 있던 때였다. 엄마가 그랬다.


여름옷은 나중에 천천히 가져가. 짐도 많은데.

에이, 뭐 하러. 나중에 하면 귀찮아. 할 때 다 가져가야지.     


내가 여름옷까지 다 꺼내 옮겨 담는 동안 엄마는 내게 줄 주방 용품을 챙긴다고 왔다갔다 움직였다.     


고무장갑 남는 거 가져갈래? 행주도 있고.     

아니, 괜찮아. 안 가져가도 돼.

왜? 거기 이런 것 없을 텐데. 카놀라유도 가져가.      

그것도 괜찮아. 안 가져갈래.     


이 외에도 챙겨준다며 이것저것 꺼내놓은 물건들 대부분은 다시 원래 놓여져 있던 수납함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가져가겠다고 한 건 별다른 무늬가 없는 흰 식기 세트와 사이즈가 다른 후라이팬 몇 개 뿐이었다.


정신 없이 집안을 돌아다니며 내 짐만 솎아내고 있으니 나갈 채비를 마친 엄마가 병원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짐을 다 싸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진료 다 봤어? 오고 있어?

응, 가는 길이야.     


전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집을 나설 때쯤 엄마 표정이 어땠더라. 그렇게 밝았던 것 같지가 않다.     


우리 엄마는 기분이 상해도 바로바로 말하기보다 혼자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엄마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어 기분이 더 가라앉는 경우가 많다는 걸,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눈치를 살피며 대화를 시도했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없어. 일은 무슨 일. 짐은 다 쌌니?

응. 아까 내가 뭐 말실수했어? 엄마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보여.     


내가 몇 번을 끈질기게 채근하고 나서야 엄마의 입이 열렸다. 사실은 내가 짐을 싸면서 엄마 말에 했던 대꾸들에 너무 마음이 상한 탓이라 했다. 내 말이 마치 칼날처럼 차갑게 들렸다고. 무척 서운했다고.     


이 집이 지긋지긋해서 나가는 것 같아, 너는.     


지금 당장 입지도 않을 여름옷을 부득부득 꺼내 짐을 싸는 걸 보고 있자니, 한 번이라도 여기 오는 수고를 마다하고 싶지 않아보였다고 그랬다. 이것 때문에 뭘 다시 오냐는 내 말은, 이 집에 그다지 오고 싶지 않다는 말로 들렸고.

     

행주랑 고무장갑 안 가져간다는 것도 그래. 네가 보기엔 다 구질구질하게 느껴져서 그러는 거 아니야?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내가 이사갈 집에 분홍색 고무장갑을 놔두고 싶지 않았다. 형광 분홍색의 촌스러운 행주도 별로 쓸 일이 없어보였다. 집에서 요리할 때 막 쓰던 카놀라유 말고, 더 좋은 기름으로 요리하며 지내고 싶기도 했다.     


짐을 싸는 김에 여름옷까지 싸서 옮기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지만, 짐을 가지러 여러 번 본가를 왔다갔다하는 수고를 다시 들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핑계로라도 자식이 얼굴을 더 보길 바랐던 엄마의 마음을 당시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드디어 집을 나가 공간을 내 취향껏 꾸리는 데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어떤 타협도 하고 싶지 않았다. 촌스러운 분홍 고무장갑이 흰 주방에 덜렁 놓여있도록 두는 것. 용도에만 맞으면 아무거나 저렴한 걸 사고, 아무렇게나 쓰는 것. 그건 내게 타협이었다.


살다보면 또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가겠지만, 시작이 그래서는 안 됐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내 마음에 꼭 들어야 했다.


나는 이미 본가에 살면서 수많은 타협을 했다. 인테리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온통 초록색인 못생긴 수납함이 갑자기 거실 한 구석에 들어와 있어도 내가 뭘 어찌할 수 없는 순간들이 무수히 많이 있어왔다. 그 순간들에 내가 느꼈던 답답함은,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불만으로 차곡차곡 적립되었다.

     

그래, 엄마 말마따나 나는 집이 지긋지긋했다. 그런 답답함이 '내 집은 이랬으면 해' 하는 로망으로 자라고, 로망은 '무조건 그래야 해. 다른 수는 없어.' 라고 외치는 아집이 됐다.


그리고 그 아집이 관계에 상처를 냈다. 소중한 사람의 마음에 못을 박았다. 내가 나가도 이 집은 여전히 우리 세 식구의 보금자리인데, 하루라도 빨리 집을 나가고 싶어하는 모습 그 자체가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엄마가 힘겹게 입밖으로 내어 짚어낸 그 순간에야, 비로소 내가 한 행동의 의미가 내게도 섬뜩하게 와닿았다.


엄마, 무슨 말이 그래. 내가 언제 지긋지긋해 했다고... 그냥 차로 옮기는 김에 한 번에 옮기면 더 편하니까 그런 거지.

근데 네 말투며 표정이며, 딱 그래. 주방 용품도. 뭐 그런 걸 챙겨, 하는 표정이야.     


꽁해 있다가도 감정이 상한 채로 하루를 넘기지 않던 엄마의 서운함이, 이번에는 며칠을 갔다.


나는 그 이후에 성공적으로 이사도, 인테리어도 마쳤지만 마음 한 구석엔 늘 내가 그 집을 사실은 버리고 나온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끈끈하게 눌러붙어 있었다.


내가 엄마를 버리고 나온 건 아닐까.

내가 나만 잘 먹고 잘 살자고 독립을 한 건 아닐까.     

     

그런 마음은 자취 생활에 적응해나가면서 차츰 옅어져 사라졌다. 그런데 남겨진 사람이 더 힘들다고, 모든 일상을 나누던 친구 같던 딸을 떠나보낸 엄마는 그 서운함을 달래는 데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쏟아야만 했다. 


며칠, 몇 주, 몇 달이 걸렸다.


물리적으로 독립이 필요했던 건 나였지만, 감정적으로 독립이 필요했던 건 우리 부모님이었다.

27년을 단짝처럼 지내고 한 이불을 덮고 자던 딸을 보낸다는 건, 어쩌면 딸인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실이었지 않을까, 지금에 와 짐작해본다.


다급한 이별은 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것처럼, 더 따뜻하게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 아쉬움은 더 자주 연락하고, 더 자주 얼굴을 비치는 자식이 되는 걸로 갚아나가고 있고 말이다.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주말에 함께 가지는 식사 자리 뿐만으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다. 내 자취가 온-고잉인 것처럼, 우리 부모님의 독립도 온-고잉이지만 세상 만사가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듯, 우리의 관계도 여기부터가 진짜 독립! 이라고 외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우리는 서툴지만 노력하고 있다. 떨어져 있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되, 마음으로는 더 끈끈하고 따뜻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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