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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돈 쓰기

by 난화

옛날 엄마들은 아껴 쓰기의 달인들이다. 비누가 조각만 남으면 구멍 난 스타킹에 모아서 완전히 해체될 때까지 썼다. 구멍 난 양말도 버리는 법 없이 바느질로 기워서 신었다. 허리가 늘어난 바지나 스커트도 손수 고무줄을 바꿔서 입었다. 뭐 하나 순순히 버리는 법이 없어서, 아이 돌 때 들인 이불이 그 애가 시집갈 때까지 농을 차지하고 있다. 비닐봉지도 수북이 모아 놨다 적재적소에 쓰고, 화장품 상자는 잡동사니 정리함이 되어 서랍 속에 놓였다. 빨래 후 마지막 헹굼물은 큰 다라이에 받아 놨다가 화장실 청소하는 데 썼다.


알뜰살뜰한 엄마 밑에 세상물정 모르는 X세대인 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홍콩 영화, pc통신, 미국 팝송과 일본 만화, 브릿지 염색 머리와 똥 싼 바지 - 신세대 노릇을 하려면 무조건 '비용'이 들었다. 친구와 떡볶이와 김말이도 먹어야 하고, 마이마이에 카세트테이프도 사서 끼워야 하고, 비디오 대여점에 선금도 넣어야 하고, 순정 만화 시리즈도 빌려 와야 하고, 축 쳐진 바지로 시내를 쓸고 다니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나는 모진 빚쟁이처럼 맨날 엄마를 들들 볶았다. 맨날 뭐가 먹고 싶다, 어디 가고 싶다, 뭐가 사고 싶다, 하면서 허리 펼 날이 없는 엄마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돈 나올 구멍이 없다는 걸 알고, 이렇게 우겨대면 서로 속만 아프지 별 수 없다는 것도 머리로는 알겠는데, 쉽사리 단념이 안 됐다. 쌀 떨어지는 날도 수두룩한데 서태지와 아이들 테이프 살 돈은 언강생심이었다. 집안 사정 뻔히 알면서 생떼를 부리는 동안에 내 안에는 '죄책감'이 깊게 박혔다.


"내가 뭘 더 좀 하고 싶은 게 왜 미안해야 될 일이야. 부아가 나서 죽겠어."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딸이 아버지에게 내뱉는 말이다. 더 멀리 뛰고 싶은데 죄책감이 발목을 잡는다는 그 말이 너무 아파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나도 내 어머니에게 저런 식으로 대들었고, 그럴수록 나쁜 년이라는 죄의식이 자리를 잡았다. 그냥 주제파악 하고 적당히 맞춰 살면 될 걸, 속 깊은 아이처럼 알아서 포기하고 괜찮은 척이라도 할 걸, 왜 나는 기어이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어 나와 어머니를 찌르는 건지... 착할 수도 없고 완전히 못될 수도 없어서 괴로운 날들이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나를 위해 뭘 사면 꼭 이유를 둘러대는 것이었다. 이건 아웃렛 두 시간 넘게 돌아서 발견한 29000원짜리 블라우스야, 이 커피는 전에 생일에 받은 모바일 쿠폰으로 산 거야, 내가 근처에 다 알아봤는데 여기가 제일 저렴하고 후기도 좋은 미용실이야, 마트 행사로 1+1이라 딸기 산 거지 평소라면 못 먹어... 누가 "샀어?"라고 한마디 던지면, 구구절절 내가 돈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를 늘어놓고는 했다. 내뱉자마자 후회가 몰려올 때도 많았다. 없어 보이게, 내가 왜 이러지?


나를 위한 돈 쓰기 = 죄책감


어릴 때는 가난한 집에서 엄마 가슴에 못 박는 자식으로, 결혼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남편의 눈치 보는 아내로 살면서 나는 완전히 얼어붙게 되었다. 스스로를 위해 뭔가를 하면 자동으로 죄의식이 반응하는 지독한 주술에 걸려 버렸다. 생활이 아닌 취향을 위한 소비를 하면 천인공로할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어느 때인가 전업주부로 있는 친구가 그릇 세트를 바꾼다고 하길래, 나는 염려하며 물었다. 신랑한테는 뭐라고 하게? 그랬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너무 갖고 싶어서라고 해야지."였다. 갖고 싶어서,라고 말해도 되는구나. 나는 그 생각은 정말 못 했다. 오랫동안 하지 못했다...


스무 살 이후 나는 항상 스스로 돈 관리를 해왔다. 내가 번 돈을 초과해서 쓰지 않으려 했고 이사나 차량 구입 같은 경우가 아니면 빚을 내지도 않았다. 결혼 십 년 동안 애 둘 키우며 평수를 넓혀 이사했다. 이 정도면 꽤나 성실하게 살아온 것 아닌가. 우리 엄마처럼 양말을 꿰매신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은 2025년도이고, 양말은 충분하니까. 나는 길거리를 쏘다니며 구경하는 걸 좋아하고, 철마다 새 옷 사 입는 것도 좋아하고 아메리카노 말고도 라테나 바닐라 라테도 즐겨 마신다. 몇 백 원 더 비싸다는 이유로 원래 아메리카노 먹고 싶었다며 자신을 설득하지 않기로 한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명대사 뒤에 슬쩍 덧붙여 본다.


"나는 원체 무용(無用) 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기분 전환을 위한 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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