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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체조를 좋아하는 여자

by 난화

두 아이를 차 뒷좌석에 태우고 횡단보도 앞 신호 대기 중이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그때 뒤에 앉은 10살 딸이 목을 길게 빼고 흥분해서 소리쳤다.


"엄마, 엄마!! 저기 할머니가 엄청 빨리 달려서 길을 건넜어!! 봤어? 나는 엄마가 뛰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저 할머니는 진짜 빠르다~~."


띠용~ 엄, 마, 가, 뛰, 는 거, 한, 번, 도, 본, 적, 이 없, 다...?


순간 엄청나게 억울한 마음이 솟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집안에서는 피곤에 쩔어서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고, 밖에서도 늘 아이들보다 뒤처져 걸었다. 아이들이 공원에서 놀면 나는 벤치에 쭈그려 앉아 추워, 추워를 읊조리며 뜨거운 라테를 홀짝였다. 아이들 눈에 역동적인 엄마의 모습이 포착된 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날랜 할머니를 보며 감탄까지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아, 자존심 상한다.


지금은 병든 나무늘보 같은 아줌마이지만, 나에게도 날렵한 시절이 있었다. 아니, 사실 82년생 도시 여자치고는 꽤나 야성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나무에 기어올라 붉은 열매를 따먹고 밭에서 무를 뽑아 이로 껍질을 갉아 내어 간식으로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은 니가 무슨 전후세대냐며 깔깔 웃었다. 고구마 서리를 하다가 걸려 친구와 밭고랑 옆에서 무릎 꿇고 손드는 벌도 받았었다. 학교 가면 여자 아이들과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할 수 있었지만, 가까운 집에는 시커먼 남자애들 뿐이라 같이 쪽수를 맞춰서 축구, 야구, 지옥훈련 놀이를 주로 했었다. 12살까지도 한 동네 사는 남자아이들과 레슬링 힘대결을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내가 챔피언이었다.


무릎을 다 덮는 교복 치마를 입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도 순한 여학생 흉내를 내기는 했다. 사춘기를 보내는 새침한 여자아이들 속에서 나는 체육 시간에 진심인 말괄량이였다. 예나 지금이나 체육 시간에 여자 아이들은 똥 씹은 표정으로 늘척거리는 걸 목격할 수 있다. 체육 선생님은 무슨 낙으로 수업을 할까 싶다. 나는 체육시간조차 어여쁘기만 한 여학우들이 늘 불만이었다. 같이 농구공도 튀기고 공도 차고 줄넘기도 휙휙 넘으면 좋겠는데, 혼자 설쳐야 되니 김이 빠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나는 점심시간에 순진한 친구들을 모아 말뚝박기를 했다. 교복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가 국룰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세련된 소녀들과 어울리며 나는 변해갔다. 얼굴에 화장품을 찍어 바르고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는 멋쟁이 여대생으로 살았다. 그러나 촌뜨기 출신의 여대생은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을 했다. 낮에는 이쁘게 치장하고 쏘다니지만, 집에 오면 남자사람친구를 불러서 같이 농구를 했다. 말이 농구지, 그냥 공만 탁탁 튀기고 아무렇게나 골을 넣는 수준이었다. 와중에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명대사, "왼 손은 거들뿐!"은 꼭 외쳤다. 혼자 자전거를 타고 밤거리를 달리는 시간도 좋아했다. 귀에는 페퍼톤스의 명랑한 음악이 흘렀고, 양볼에는 짜릿한 바람이 스쳤다. 두 다리만 멀쩡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목적 없이 길을 걸었다. 일부러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서너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걷는 날이 많았다.


책상 앞에 앉아 보낸 세월이 인생의 절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반대로 펄펄 날아다니는 시간을 무척 사랑했다. 걷고 뛰는 동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경험되었고, 왠지 모를 감동과 감사가 찾아들었다. 두 다리로 거리를 걷는 동안, 내 귀에 음악이 있고 숨 쉬는 공기와 바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 바람에는 언제나 짙은 그리움 같은 것이 묻어와 나의 살아온 날들을 애틋하게 끌어안게 해 주었다.


이런 내가 횡단보도 뛰는 할매와 비교를 당하니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출산과 동시에 나는 운동 경단녀(경력단절녀)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제 거북목, 척추측만증, 족저근막염과 손가락관절염을 보유한 최약체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를 아끼는 연습을 시작한 지금, 더 이상 이런 오명 속에 살 수는 없다. 잃어버린 나의 명예를 되찾으리라 작정을 하고 전에 다이소에서 사놓은 요가매트를 꺼냈다. 아이들이 잠든 밤, 소파에 드러누워 유튜브 투어를 하는 대신, 신발장 거울 앞에 선다. 목을 젖히며 스트레칭을 하는데 우두둑 소리가 난다. 납덩이를 얹어놓은 묵직한 어깨를 슬슬 돌려본다. 오늘은 스쾃 50개부터 시작이다. 기다려라 딸아, 엄마가 바람처럼 달리는 걸 보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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