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음식을 묻는 질문에 선뜻 뭐가 떠오르지 않아 우물거린다. 쉴 때는 뭘 하냐고 물어도 글쎄요, 정도밖에 할 말이 없다. 즐기는 취미가 있냐고 할 때는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한다. 애들 반찬에 맞춰서 먹거나 배고픔을 채우려고 허겁지겁 먹다 보니 뭐가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잘 안 하게 된다. 가끔 치킨이나 피자를 시켜 먹지만 한 두 조각 손대고 나면 금세 질린다. 쉴 때는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데 그런 답을 하기가 좀 민망하다. 시간이 생겨도 뭘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힘도 없는 애들 엄마에게 취미에 대해 묻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본다.
서른 네 살에 결혼을 하기 전까지, 나는 그야말로 활화산 같은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세상에 해보고 싶은 일도 많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싸돌아다니는 고질병까지 있어서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 먹고살기 어려운 촌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대학을 갔을 때,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잔뜩 홀려서 쫓아다니기 바빴다. 마치 탑에 갇힌 라푼젤이 탈출해서 세상을 처음 본 것처럼, 나는 들뜨고 흥분되고 조바심이 났다.
어여쁘게 화장하고 명품백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오는 애들은 전혀 안 부러웠지만,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가진 이들에게는 동경과 질시를 느꼈다. 아르바이트하며 만난 영화광 오빠를 따라다니며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재즈를 즐겨 듣던 첫사랑에게 흠뻑 빠졌다. 코엑스와 부천에서 열리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자원봉사자로 일하기도 하고, 아마추어 뮤지컬 배우로 지원해서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아주 실낱같은 인연만 닿아도 지하철을 타고 달려가 서울 곳곳을 누비며 다녔고, 시외버스와 기차를 타고 전라도나 경상도로 향했다. 찜질방에서 자며 젖은 양말을 말리는 알뜰한 여행이었지만, 새로운 풍경 속에 들어서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일,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풍경에 대해 얼마든지 떠들 수 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뜨거웠던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데 꼭 10년이 걸렸다. 두려움 없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딛고 후회조차 쉬이 하지 않는 당찬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이불속에 숨어 사는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단지 내가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달리진 걸까? 아니면 나를 아낄 줄 모른 채 무식하게 가족에게 모든 걸 쏟아부은 미련함 때문일까?
결혼 생활을 하는 내내 스스로를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다 쏟고 있는데, 내 마음은 늘 여기 아닌 어딘가를 꿈꾸며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내가 걷던 거리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흑백의 풍경으로 그려지고는 했다. 아내와 엄마로 사는 게 버겁고 무거울 때마다 내가 반짝이던 시절을 추억하며 견뎠다. 가족에게 온전한 사랑을 다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늘 미안했는데, 이제 보니 가장 안쓰러운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길을 잃을 때가 있다. 인생이 던져준 숙제를 착실하게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며 흠칫하게 되는 것이다. 진작 괴롭다는 소리가 저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왔을 텐데, 남들도 다 이러고 산다고,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냐고, 그래도 남들은 좋게 봐주지 않느냐며 가슴의 아우성을 묻는다. 오히려 원 없이 인생을 펑펑 산 사람들은 그 주변이 어지럽고 힘들망정 자기는 가뿐한데, 순한 사람들은 자기만 힘들고 모두가 편해지는 쪽을 택하고 만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미안해질 필요는 없는데, 내 인생도 한 번인데, 나를 사랑하는 게 남을 상처 입히는 일은 아닐 텐데, 이제 그만 이 짐을 좀 내려놔도 되지 않을까? 모른 척 눈을 좀 감아도 되지 않을까?
드라마를 보며 펑펑 울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짬짬이 읽고, 정한 시간에 글을 쓰고, 다가올 연휴의 여행 계획을 세운다. 지난주에는 마음에 꼭 드는 스커트를 입고 친구와 함께 꽃구경도 다녀왔다. 이게 어쩌면 경직된 내 인생을 향한 재활 훈련일지도 모르겠다. 이팔청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때의 건강하고 씩씩했던 나를 되찾을 길은 없지만, 과거의 예쁜 시간들을 잘 보내주고 다가올 꽃중년의 미래를 그려 보려 한다.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