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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주고 잘 받기

by 난화

이번 명절엔 뭘 보내지?

결혼식 축의금은 얼마가 적당할까?

출산 선물은 뭐가 좋을까? 그냥 물어볼까?

생일에 선물이 나을까, 그냥 현금으로 할까?

조카들 용돈은 얼마씩 줘야 하는지 아는 사람...?


어른 노릇 하고 살기 진짜 쉽지 않다. 어른의 진심이란 봉투에 담긴 지폐의 액수로 표현된다. 돈을 쓰지 않는 마음이란 폐기 처분되기 쉽다. 어릴 때는 꽃분홍 편지지에 손글씨로 꾹꾹 눌러 적어도 얼마든지 축복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편지와 함께 가나초콜릿이나 봉지 과자 하나만 건네도 상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던 시절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접은 종이학 1000마리가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상대를 위한 시간과 정성을 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쓸모없는 선물을 주고받으면서도 깔깔거린다. 방구석에 처박혀 잊힌 키링이 넘쳐나지만, 새로운 인형 키링을 받으면 방방 뛰며 좋아한다. 친구가 아니라 자기가 갖고 싶거나 먹고 싶은 걸 사서 선물로 주고, 그걸 또 같이 나눠 갖는다. 문방구에서 산 천 원짜리 우정반지를 애지중지하다가 녹슬고 나면 쳐다도 안 본다. 우리 아들은 내가 불러준 대로 내 생일 카드를 쓰고 나서 자랑스럽게 나보고 읽어 보란다. 심지어 나의 감동적인 리액션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참 쉽고 편하다.


어른의 선물은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 고민이 정말 상대의 기쁨과 행복을 위한 것인지, 경우에 벗어나지 않는 최선의 도리를 찾기 위한 건지 분명하지 않다. 나의 가족, 친구, 지인의 애경사에 마음을 표현하려는 좋은 의도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부담이 따르는 게 사실이다. 월급쟁이의 한 달 살림살이는 뻔한 것이고, 늘 버둥거리며 살고 있는 와중에 '경조사'란 살림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변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애 둘 키우는 친한 동생이 5월은 가정의 달이 아니라 '지옥의 달'이라며 하소연을 했다. 어린이날 x2명의 자식들, 어버이날 x양가 어른들 식사 및 용돈, 부부의 날도 모자라 시어머니 생신도 5월이라며 울상이었다. 사실 내 딴에는 한다고 하는데, 어느 때는 겨우 욕먹지 않을 본전치기 정도인 듯싶어 서글프고, 더 잘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 화딱지가 나기도 한다.


어릴 때는 선물이 '축제'의 영역이었다면, 지금은 '책임'의 자리로 옮겨간 듯싶다. 예의와 배려를 갖춘 어른이라면 당연히 해내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 수년 전 내 결혼식에 축의금 5만 원을 낸 친구 결혼식에 물가상승분을 반영할 것인지 고민한다. 예식장 식대가 너무 비싸서 결혼식에 참석하면 봉투에 돈을 더 담아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온라인에서 돌잔치 초대 손님의 범위나 대학생 조카 용돈을 줘야 하는지 등에 대한 논쟁이 전국민적으로 이루어지는 걸 보면 집집마다 이런 고민들을 다 하고 있는 듯싶다.


나는 '주고 싶어 안달 난 병'에 걸린 사람이다. 그런데 가진 게 없다. 이렇게 평생 없을 줄 몰랐다. 그래서 맨날 속이 쓰리다. 학창 시절에는 종이만 보이면 편지를 썼다. 메모지나 색종이에도 쓰고, 잡지책에 멋진 페이지를 찢어서 쓰고, 아예 편지지책을 사서 뜯어 쓰기도 했다. 그렇게 10통, 20통을 쓰면 답장은 하나 받을까 말까였지만 내 편지를 받아 읽을 친구의 얼굴이 내겐 이쁜 답장이었다. 밥을 사도 내가 돈을 더 내야 마음이 편하고, 집에 온 사람을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게 싫어서 여분으로 사둔 화장품이라도 챙겨 주었다. 신혼여행에서 시가 부모님과 형제들 선물을 다 손수 포장하고 리본을 묶고 라벨지까지 붙여서 준비했었다. 시가에 내려가면 어머니의 낡은 밥솥, 가스레인지 등을 눈여겨봐 뒀다가 그다음에 새 걸로 사서 보냈다. 다 내가 신이 나서 한 일이었다.


문제는 내 마음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돈이 없어서 서글픈 순간이 자주 생겼다.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에게 도리를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정작 누가 나를 챙겨주면 몸 둘 바를 몰라하며 은인처럼 대했다. 얼마 전 만난 좋은 어른이 내게 이것이 건강한 마음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세요. 말로 하세요.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는데, 형편이 안 돼서 표현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고요.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상대는 나에게 선물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나의 진심을 바라는 거예요. 당신 주위에는 그런 좋은 사람들이 있고, 당신 역시 좋은 사람이기에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내 마음을 담아낼 포장지를 구하는데 온 신경을 쓰다가, 정작 알맹이를 놓쳐 버린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이모나 작은 아빠가 성실하고 건강하게 살아계시면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것으로 충분히 감사하다. 결혼해서 애 키우느라 정신없이 사는 친구와 몇 년에 한 번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충분히 행복하다. 내 마음이 그렇다면 그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자꾸 뭘 줘야 한다는 부채의식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한다. 잘 주고 잘 받는 세련된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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