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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Mar 06. 2024

그 언니는 장학사, 이 친구는 교감  1.

장학사 언니의 이야기

나이를 먼저 먹는 의미에 대해 알게 해 준 언니 H가 있다. 책에서나 언니라 쓰지만 이렇게 불러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지금은 ‘장학사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마음의 거리와 실제 상황을 일치시키기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H 언니를 만나면 '장학사님'도 '언니'도 입에서 오물거리다 두 호칭 모두 생략하고 필요한 말만 하고 만다. 그녀였다면 분명 현명한 방법을 꺼내어 짜잔! 하고 알려주었을 텐데 말이다.          

H 언니는 지혜로웠다. 그리고 빨랐다. 누군가가 고민을 하면 늘 재치 있는 해답을 주었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 속이 다 후련할 때가 많았다. 즉문즉답도 좋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항상 촌철살인도 가능한 대단한 말의 선수! 지금도 나는 H 언니가 강사 김미경이나 김인경과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비유라 어떨지 모르지만 법륜스님의 강연을 들었을 때 느낀 통찰력 또한 언니에게 있었다.

지금은 정확한 상황이 기억도 안 나지만, 나이에 대해 누군가 함부로 말하는 상황이 있었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미디어에서도 많이 나오는 말이라 흔한 표현이지만 H 언니가 20년 전에 했던 말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는지! 갈라치기하려던 이는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이어지는 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입에서 나오는 족족 맞는 말을 하는 언니가 너무 멋졌다. 말을 하고 있을 때의 확신도 멋지고 섬세하게 상황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대단했다. 감히 따라가기는커녕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캐릭터다. 요즘 아이들의 표현으로 치면 걸크러시 정도 되겠다. 동경의 대상이던 언니는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역시! 였다. 그녀다웠다.       

H로 말하자면 뭐든 야무지게 잘 해내는 사람이라 일도 많았고 성과도 훌륭했다. 당연히 주변에서 승진을 준비해 보라거나 장학사 시험을 보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든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마음만 먹으면 뚝딱 바로 해낼 것 같은데 말이다.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졌는데 정작 본인은 가지지 않겠다는 욕심 없음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생활지도를 할 때도 명쾌한 답을 주어서 우리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가 어느 부터인가 언니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이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힘들어하는 교사를 위해 무엇을 도울 건가?’를 고민했다.

그때의 나는 그저 교실 안의 한 명 한 명, 오늘 있었던 일 하나하나를 되짚어 생각하고 고민하는 수준이었는데 이 언니는 다른 차원의 고민을 했다. 역시 멋졌다.  멋진 생각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으로 바뀌고 마침내 언니가 스스로 선택한 때에 비로소 장학사가 되었다. 그 지점 또한 멋지다.      



나는 그 당시, H 언니의 고민 ‘어떻게 도울 건가?’의 범위가  교실 혹은 동학년 선생님의 교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고민이 교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전남의 문제였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인구소멸을 논하고 지역 현안에 대해 떠들어대도 채널을 돌리기 일쑤였는데 어느 날부터 멈추어 귀 기울이게 되었다. 다음은 전남의 진로진학교육의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전남지역은 섬과 농어촌지역이 차지하는 비율과 평균연령이 높은 반면 인구밀도는 매우 낮다. 각종 보도자료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순천, 목포, 여수 등의 도시지역은 이들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인구 비율이 높고 학급수, 학생수 감소세도 다소 완만하다. 아마 이런 이유로 20여 년 동안이나 교직 생활을 해오면서도 나는 전남지역의 ‘작은학교’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최근 ‘전남지역’의 여러 현안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교사로서의 생각이나 고민은 주로 내가 맡은 학급의 학생과 해당 마을이나 학구,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문직시험의 준비와 응시 과정은 그 범위를 좀 더 넓혀준 계기가 되었다. 전남지역 전체에 대해 생각하고 살펴보고 싶어졌다. 특히 전남의 현황과 관련하여 진로진학교육 분야에 대한 생각을 지나치지 않고 본 보고서를 통해 조금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선 전남의‘작은학교’가 전남지역 전체에서 무려 54.1%(2023.4.1. 기준. 전남교육청)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았다. 주로 도시지역에 근무했던 나로서는 실감 나지 않는 수치로 다가올 뿐이었다. 각종 시사 프로그램에서 전남지역의 현안문제 중 인구소멸이 자주 거론되었지만 작은학교의 비율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험을 끝내고 도시지역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가 본 풍경은 다시 한번 전남의 현실을 느끼게 했다. 창밖에는 눈부신 들판과 산천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특별한 건물도 집도 없이 푸르고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이렇게 전남에서 학교는 사라져 가는가? 이렇게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어 가는가? 나는 눈물까지 왈칵 나면서 비로소 전남의 작은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진로진학교육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탐색하고 싶어졌다.




언니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다.’를 바꾸어 생각하니 ‘너는 고민해 보았느냐?’였다. 나는 느닷없이 원대한 꿈 대신 작은 전남을 걱정하게 되었다. 아마 먼저 공부를 해본 H 언니도 이 마음이었을까? 완주할 자신은 없었지만 전남에 대해, 그 안의 교육에 대해 마음에서 커다란 조각을 꺼내어 쏟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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