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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Mar 21. 2024

우리집 각자도생 이야기

드라이어도, 밥상도 n+1

이번에는 나와 딸이 집을 나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다. 본 집에서 살림살이를 챙겨서 따로 생긴 나의 공간으로 나오게 된 것이. 딸은 전체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고등학교를 1월에 졸업하여 지금은 다시 대학교의 기숙사로 옮겨 갔으니 딸이 집을 나온 것은 꽤 경력이 있는 셈이다. 물론 나도 일찍이 30 하고도 몇 년 전 학창 시절에 자취 생활을 상당히 거쳤다. 그로부터 또 10여 년을 지나 직장에 다니게 된 이후 관사(官舍) 생활을 한 적도 있었으니 내가 집과 떨어져 지낸 이야기는 역사마저 깊다.



본의 아니게 집이 아닌 곳에 머물게 된 일은 어쩌면 우리 가족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시쳇말로 3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다는 주말부부도 시기별로 오래 했고, 아이들도 학교가 이유였지만 나이에 비해 상당한 시간을 집이 아닌 곳을 집처럼 살아왔다. 그렇다고 가출을 감행하거나 말 못 할 사연을 가진 가족이 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우리 가족의 빈 둥지 기간은 길고 길다.

올해는 다시 내가 관사에 살게 되었고 짐을 챙기다 계산을 해보니 이렇다. 나와 남편이 결혼을 한 후 지금까지의 기간과 아들의 나이, 딸의 나이를 모두 더하면 70년에 가깝다. 그런데 그중에 우리 부부가 떨어져 지냈거나 아들이 기숙사에 산 기간과 딸이 기숙사에 산 기간을 모두 빼보니 23년 동안은 가족 중 누군가가 떨어져 살았다. 다시금 놀랍다.



언젠가 동생이 우리 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머리를 말리려다 욕실에서, 화장대에서, 자던 방에서 발견된 드라이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드라이어가 몇 개야?"

"식구 수만큼 있지. 형부도 관사에 가지고 있던 거, 애들도 기숙사에 가지고 있던 거, 원래 집에서 쓰던 거. 게다가 여행용으로 쓰던 작은 것까지 욕실 두 곳으로 나눠서 넣어놨으니 식구수보다 한 개 더 많네."

내가 아무리 쇼핑을 좋아한대도 비슷한 물건을 여러 갖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헤어드라이어를.

한국인의 소파 사용습관이 소파 아래의 바닥에서 기대어 앉는 것이라는데 우리 집에서는 밥상의 용도가 비슷하다. 식사를 때는 식탁을 이용하지만 이상하게도 간식이나 야식을 먹을 때면 작은 상이나 탁자를 펼쳐놓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 먹는 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짐을 싸려고 보니 밥상 용도로 쓸 수 있는 탁자도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수를 세어보니 또다시 다섯 개. 돌아가며 집에서 떨어져 따로 생활하다 보니 이래저래 생겨난 생활용품들의 수가 늘어난 것이다.



드라이어를 각자 사용하고, 작은 탁자에서 혼자 무언가를 먹었을 각자의 공간은 어쩌면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 작은 밥상 앞에 앉아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만큼 건강하게 나이 들고, 든든하고 밝게 자라주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이런 모습이 있기까지 혼자 앓고 견뎌야 했던 아픔의 시간도, 느긋하게 참아야 하는 인내의 시간도, 몇 해를 하루같이 노력했던 시간도 있었음을 안다. 그리고 멀리서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이야기한 속 깊은 마음들도 안다.

좋은 일이 닥친 그 찰나 마다에 얼싸안고 서로 등을 토닥여주지 못했음도 안타깝다. 그때마다 기쁨의 호흡을 가다듬고 저 건너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준 고마움도 안다.

이 모두가 몸은 비록 각자도생 살아왔지만 그 거리와 시간만큼의 안타까움과 사랑이 단단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하다. 오늘 갑자기 찾아든 꽃샘추위 때문이 아니다. 혼자 앉은 밥상 앞이라서가 아니다. 아~보고 싶다.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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