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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Mar 28. 2024

시술받은 날의 사고

마음이 병을 부른다

접촉사고 가해자가 되었다. 장롱면허도 아니고 여성비하 같은 여사님 운전, 이라는 말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한순간 그렇게 되어버렸다. 덕분에 20년 무사고 기록은 깨졌고 첫 사고를 저지른 내 마음은 멈췄다.

모든 게 덜렁거림 때문이다. 사실 내 직업의 3월은 가장 바쁘고 정신없는 달이다. 마음만 앞설 뿐 몸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지기 일쑤인 시기다. 그래서 그날도 조퇴를 해서는 안될 것 같은 정도의 일이 쌓여있었다. 모두 처리하고 보니 퇴근 시간을 오히려 넘겼다. 그건 예삿일이라 괜찮은데 문제는 병원 진료시간이었다.

다음날인 주말에는 진료가 없는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시술을 받아야 했다. 내 나이대의 시술이라 함은 모름지기 피부과나 성형외과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아직 간담췌, 정형외과, 신경외과 등에서 받는 이름만으로도 겁이 나는 시술은 멀리하고 싶다. 인생선배인 언니들의 말로는 그나마 피부과도 거의 막차라서 서둘러야 한다는데 여러모로 낭패였다. 그날 내가 받은 시술은 무릎 연골주사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더 이상은 약 만으로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통증에 시달린 지 두 달이 되어갈 무렵이다. 더 먼저 시술을 받자니 짐을 옮길 일이 줄줄이 걸려있었다. 딱히 이삿짐센터를 끼고 하기는 애매한 양의 살림살이 이동이 며칠 간격으로 연속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1~2월에 통증이 올 때면 독사의 혀가 무릎을 핥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날짜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치료의 효과를 미처 보지도 못할 게 뻔했다. 시술을 받았더라도 남편의 관사에서 짐을 빼고, 아이들 기숙사의 짐을 챙겨야 했을 것이다. 내 교실의 짐을 빼고, 다시 남편의 새 사무실의 물건을 정리해 주었다. 딸의 고등학교 때 기숙사짐은 정리하여 대학의 기숙사로 옮길 수 있게 했다. 그러고 나니 마지막으로 새 교실과 내가 머물 관사에 짐을 넣을 날짜가 되었다. 그렇게 나의 2월은 끝이 나고 바쁜 3월이 된 것이다. 드디어 작정하고 시술을 받을 참이었다.



접촉사고가 난 날은 총 세 번에 나누어 맞는 주사 중 두 번째의 날이었다. 대기시간을 고려하면 내가 마지막 환자쯤 될 것 같은 시간에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접수 마감이 임박한 시간이라 늘 만원이던 주차장도 안쪽이 여럿 비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 그랬는지 차단바를 막 지나서 비어있는 한 자리를 점찍었다. 하필!

후진 기어를 넣고 주변도 살폈다. 무사고 20년도 두 라이트 부라리며 기다리는 뒷 차들의 행렬은 등에 땀이 나게 하므로 뒤를 살피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 주차장은 구역도 넓은 편이었고 모든 게 완벽한 준비였다.

평소 실력과 심하게 큰 내 차의 센서음으로는 식은 죽 먹기인 주차였다. 그런데!!! 그렇게 크던 센서음도 안 들리고 시뻘겋고 두껍게 표시되던 경고 화면도 안보였다. 결국 기껏해야 시속 5km 정도였을 차가 묵직한 느낌이 들고 이상한 마음에 일단 비상등을 켰다. 아니 주차를 마음먹었을 때부터 켰었을지도 모른다. 기억의 디테일이 부족하다. 아무튼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멈추어 문을 열고 내렸다. 다행히 뒤에는 차가 한 대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려서 보니 두 차 모두에 한 뼘 넘는 흠집이 보였다.



가해자로서 처음 겪는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운전석 앞쪽을 보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 신호음이 들리는 동안 누가 전화를 받을지, 상황을 듣고 나서 뭐라고 반응할지 무척 떨렸다. 나는 새가슴이었다. 다행히? 상황을 듣고 곧 오겠다고 하신 분은 나보다 조금 더 연배가 있는 여성 분이었다. 이제 막 병원 접수를 했는데 다시 왔다고 하시며 다리를 절뚝이셨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하고 아파서 병원에 오신 분을 그것도 다리가 불편한데 다시 걷게 해 드려 무척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전화번호 등을 주고받았다.

보험 이야기가 나오길래 가입자 명의가 필요한지 물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쓸데없는 질문이었는데 그 정도로 사고에 대해 무지했다. 그런데 그분의 반응과 이어지는 말에 나는 웃었다.

"명의가 누군데요?"

"남편이에요."

"아이고~그럼 야단맞으니까 안되지!"

상황에 맞지 않게 마음속으로 빵 터지는 웃음이 생기면서 겨우 가해자로서의 멘털 붕괴가 조금 나아졌다. 그제야 이성이 찾아지면서 일의 순서도 떠올랐다. 죄송하다고, 치료 잘 받으시라고, 견적을 보고 연락을 달라고 하고는 나도 마감 시간의 병원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겨우 진정시키고 진료실 앞에 이르렀는데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기다리는 진료실 앞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투덜대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분이 왜 그러냐 물었다.

"지난번에 연골주사를 추천받아서 맞았는데 오히려 퉁퉁 붓고 통증에 난리가 났어요."

'어라? 내가 맞고있는 그 연골주사? 나도 주사를 맞은 후가 더 아픈 중인데 뭐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저지른 사고에 온 마음이 뒤숭숭했는데 그 말이 귀에 들리는 순간 내 뇌에는 내가 맞은 주사에 대한 불안이 접수되었다. 그리고 자꾸만 그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자 그렇게 친절하던 의사 선생님의 설명도 맞는지 검색하게 되고, 주사제도 스테로이드성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투덜대던 환자는 들어주는 사람이 생겨서 그런지 한결 마음에 평안을 찾고 온화해졌다. 반면 내 마음은 불안으로 병을 켜켜이 쌓아 올리있었다.

그날은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정신없이 흘렀는데 계산을 하다 보니 문득 액수가 너무나 컸다. 작년 이맘때도 똑같은 과정으로 연골주사를 맞았는데 턱없이 두 배의 돈을 내게 된 것이 의아해서 확인해 달라고 했다. 지난번 X-ray를 포함한 비용과 주사만 맞는 날의 비용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병원 측이 잘못 계산한 것이다. 검사비를 그날도 청구한 것인데 원무과에서는 맞다고 하고 진료실에서는 확인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기다리라고 했다.

한참 후에야 원무과에서 계산착오였다, 삼만 얼마만 내면 된다고 설명했다. 나는 원무과와 진료실의 가운데쯤의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들끼리 전문용어를 섞어 대화를 하고 이리저리 오가며 얻은 결론을 전해 주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이 카드만 받고 영수증만 돌려주었다. 참 꼬이는 날이다 싶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사람이 크게 다치지도 않은 작은 사고에 나는 크게 마음을 빼앗겼다. 한동안 병원 주차장에서 시동조차 걸지 못하고 우두커니 차를 세워두고 있던 나를 돌아본다. 마음이 조급하더니 접촉 사고를 내게 되었고 이후의 일들을 자꾸만 연관 지어 마음이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사고를 불행의 징조라 생각해서든 처음 겪는 일이라 놀라서 정신줄을 바짝 잡아두지 못해서든 나는 여유를 잃어버렸다. 평소에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일에 판단이 흐려지고 환경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렸으며 그것들이 그날의 불운을 더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첫 접촉사고가 만약 보이스 피싱 같은 종류였다면 더 큰 마음의 짐을 얻었을 텐데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생각, 보기만 해도 무서운 건장한 남성이 피해자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 불쾌하거나 위협, 혐오의 대화가 오가지 않고 일을 마무리하게 더어 감사하다는 생각은 한참 후에서야 할 수 있었다.

마음의 병은 몸이 피곤할 정도로 편안한 풍경 속에서 걷고, 소화를 걱정하지 않고 맛난 음식을 맛보고, 낱말이나 문맥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말해도 되는 이들과 즐겁게 대화하는 것으로 풀 수 있었다. 가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먹고 운동하고 떠들어대는 것이 몸에는 안 좋을지 몰라도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필요하기도 하다는 생각도 했다.



보톡스로 주름을 펴지는 못했지만 마구 구겨져있던 마음이 팽팽하게 다시 살아나는 봄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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