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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Aug 11. 2024

반(半)과 반(伴) 그리고 반(反)

       

어제부터 수의(囚衣)를 갈아입었습니다.

하복에서 동복으로 춘추복을 건너뛰었습니다.

누가 입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밖에 있겠지요.

달라진 건 옷의 두께보다 색깔입니다.

미결수(未決囚)에서 기결수(旣決囚)가 되니 왠지 고참이 된 것 같습니다.



엊그제 같던 장마의 기억이 흐릿합니다.

새벽에 누워서 눈을 뜨면 가을도 없이 겨울을 거울처럼 코끝에 마주한 듯합니다.

얇은 옷을 입은 사람이 한겨울의 생생한 추위를 먼저 예감한다고 합니다.

수인(囚人)이 가장 얇은 삶의 외투를 입은 사람 같습니다.

이미 발가벗겨진 맨살만 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는 가릴 게 없어진 이들은 추위를 서로의 맨살에 기대며 새벽을 견딥니다.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것은 체온뿐입니다.

내 몸을 만져보면 따뜻합니다.

얼어붙었던 날들은 머릿속에, 마음속에 있던 숫자였습니다. 몸은 여전히 변한 게 없습니다.



산사의 범종 소리가 가슴을 울리는 것은 종소리를 세지 않기 때문이라지요.

때마다 치는 숫자에 가르침이 없지 않겠지만, 머리보다 몸이 떨리는 것은 마음이 울려서 일 겁니다.

깨달음은 쉬워야 한다는 숫타니파타의 글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신 선생님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셨습니다.

“... 지지직... 여기는 희망봉이다.... 오바”

오래전 아프리카 최남단을 항해하시던 아버님의 무전을 집 전화로 받았던 날이 기억났습니다.


신 선생님은 이번에도 엽서에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피아노 건반’입니다.

하얀색과 검은색의 건반은 오랜 흑백 갈등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사입니다.

흑백을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려놓으면 화음(和音)입니다.

단순한 색깔의 혼합이 아닙니다.

흑백의 건반은 반(半) 음과 온음의 조화입니다.

절반(半)은 또 다른 절반(半)과의 동반(同伴)입니다.

남는 의문은 있습니다.

왜, 흰색은 온음이고, 검은색이 반음인가입니다.

흰건반을 온음으로, 검은건반을 반음으로 만든 이유가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고…
절반의 환희는 절반의 비탄과 같고,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이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라고 합니다.


‘개선장군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초상집에 조의를 표하는 일’이라 했던 노자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한자(漢字)가 절묘합니다.

반(半)에 사람(人)이 함께하면 짝(伴)이 됩니다.

그래서 당신(人)은 나(半)에게 동반(同伴)이고 반려(伴侶)이며 도반(道伴)입니다.

서로의 반(半)이 만나 반(伴)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흰건반만으로, 검은건반만으로 된 피아노가 없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불교의 연기(緣起)가 쉬워 보입니다.

나를 반(半)으로 여길 때 너를 반(伴)으로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나의 승리는 너의 패배이며, 나의 환호가 너의 절규라는 것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는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이 흔합니다.

책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읽었던 감동에 다시 밑줄을 그으려는 마음이 있어서입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서입니다.


각성(覺醒)은 한 차례로 치러지는 게 아닙니다.

달성(達成)을 향해가는 노정(路程)이며 과정(過程)입니다.

선생님은 반성(反省)이 한 개인의 행동을 돌아보는 것이라면, 성찰(省察)이란 자기가 빠져있는 우물 자체를 조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찰은 혼자만의 일로 보지 않으려나 봅니다.

교도소는 단체의 성찰을 지시하는 교화의 간판들을 곳곳에 묵히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연대의 깃발을 올렸지만, 안에서는 주먹도 쥐지 않고 머리 위로 치켜세울 일이 없습니다.


눈(目)을 작게(少) 뜨면 자세히 들여다볼(省)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反) 살피는(省) 반성(反省)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성찰(省察)은 단지 이전 행동으로 돌이키려는(反) 일회적 회귀에 있지 않습니다.

이전(反)에 대한 수긍을 위해 현재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결과를 어제의 원인에서 찾기보다는, 내일의 결과를 위해 오늘의 원인을 만들려는 반추(反芻)입니다.

연기(緣起)는 수동(受動)이 아니라 능동(能動)입니다.

나의 성찰(省察)은 어제로(反)가 아니라, 내일을 향한 오늘의 반추(反芻)입니다.


그러니 읽었던 책을 또 읽는 것은 재독(再讀)이 아니라 되새김의 반추(反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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