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는 감옥입니다.
가능이 자유라면, 불가능은 구속입니다.
할 수 있는 가능이 희망처럼 보이지만, 할 수 없는 불가능이 희망의 둥지라는 생각입니다.
감옥 안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은 더 많아집니다.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없는 일임을 알 때, 그것은 희망이 되고, 계획이 되어, 스스로와의 약속이 됩니다.
몸이 갇히면 그제야 정신은 자유롭게 날갯짓을 합니다.
‘새장 속의 새가 노래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惰性)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속이 묶임이라면 자유는 풀림입니다.
묶임이 피동이라면 스스로 벗어나지 않는 수동의 풀림 또한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유(自由)가 자신(自)의 이유(由)라는 말처럼, 스스로 묶고 풀어내는 자신의 이유를 가질 때, 진정한 자유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타성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풀려나는 출소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스스로 풀어내는 일이 타성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봅니다.
타성(惰性)은 남으로부터 기인하기보다는 오랜 자신의 습성(習性)이기 쉽습니다.
나로부터의 자유는, 오랜 나의 습벽(習癖)에서 벗어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의 타성을 찾아 나서는 일로 종일 생각에 잠겼습니다.
좁은 거실에 여럿이 함께 있는 여기는 깊은 산중의 암자도 아니고, 클래식 음악 감상실도 아닙니다.
생각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인드라망의 얼기(plexus)를 따라가는 화두(話頭)의 길이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나의 불편은 나 보다 나를 둘러싼 조건과 주위를 둘러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구속된 날부터 젖어온 나의 타성이 되어간 듯합니다.
수행은 ‘닦음’(修)입니다.
그에 앞서 ‘씻음’(洗)이 먼저입니다.
여느 산사(山寺)마다 그 순서를 가르쳐 줍니다.
마음을 하나로 세우고 일주문(一株門)을 들어서면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속세(俗世)를 벗어나기 위한 관문(關門)의 핵심은 물로 씻는 절차입니다.
기독교에서 세례(洗禮)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구원에 선행하는 것이 죄 씻음입니다.
죄가 없는/을 예수조차 제일 먼저 한 일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일입니다.
흔하게 보아왔던 ‘세례’에 대한 생각에서 오래 멈추었습니다.
한 사람의 죄 씻음이 단지 물 한 번 뿌리거나, 물에 한 번 담그는 것으로 끝이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요단강물에 씻기 위해 강둑에 모여 긴 줄을 이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죄 씻음 전에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이 그 줄에 선다는 것입니다.
죄 씻음 전에, 죄인임을 남에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 줄에 설 수 있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하루였습니다.
세례가 죄 씻음이라지만 세례식에서 죄의 공표(公表)는 없습니다.
감추어지기에 공연(公演)이 됩니다.
몸의 때를 벗기려면 벗어야 합니다.
대중 앞에 발가벗고 나서는 이는 없습니다.
죄수들은 발가벗겨진 이들입니다.
스스로의 발걸음은 아니었겠지만, 요단강둑에 긴 줄을 선 사람들입니다.
하늘에서 돌들이 떨어진 날에 나는 이미 요단강둑에 서 있게 된지도 모릅니다.
세례는 은밀한 고해성사가 아닙니다.
고백의 공지(公知)입니다.
세례보다 세례터로 나서는 발걸음과 그 긴 길에 서는 일입니다.
숨김이 아니라, 드러냄이지요.
고발이 남의 죄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라면, 고백은 나의 죄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고발이 녹슨 창이라면, 고백은 날카로운 메스 같습니다.
고발이 내 앞에 차가운 벽을 세운다면, 고백은 남 앞에 따뜻한 창을 엽니다.
고발이 독을 담은 잔을 건넨다면, 고백은 눈물을 담은 잔을 마십니다.
고발이 분노의 불꽃을 피운다면, 고백은 용서의 빛을 밝힙니다.
고발은 세상을 찢어놓고, 고백은 마음을 이어 붙입니다.
고발은 밖으로 소리를 높이고, 고백은 안의 소리를 듣게 합니다.
고발은 남을 넘어뜨리고, 고백은 자신을 일으킵니다.
고발은 거짓의 갑옷을 입기도 하지만, 고백은 진실의 옷을 벗게 합니다.
고발이 분노로 짓눌러진 검은 잉크라면, 고백은 회개의 눈물로 씻겨진 흰 종이입니다.
고발이 돌을 든다면, 고백은 물을 듭니다.
오늘도 갠지스강에 나와서 몸을 씻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 강물에 화장을 마친 유골의 조각과 재가 흐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믿음은 단순하고 그래서 더욱 깨지지 않는 단단함이 엿보입니다.
강물에 몸을 씻는 일이 죄를 씻을 수 있다는 믿음보다 앞서는 것은,
'나는 죄인이다'를 남들에게 보이며 강물로 들어가는 고백의 용기입니다.
모두가 쳐다보는 요단강둑 위, 그 줄에 서는 사람들의 용기는 이미 깨끗한 양심입니다.
갠지스강물과 요단강물의 효험의 차이는 없습니다.
둘 모두 고여서 썩은 물이 아닌 흐르는 강물이라 그렇습니다.
금욕의 수행을 낮게 볼 수는 없지만, 은밀한 암자에서가 아닌 드넓은 광야에 줄을 서는 모습이 더욱 경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닦음’(修)보다 ‘씻음’(洗)이 먼저이고, 발가벗겨지는 고발의 대상이 아니라, 발가벗는 자신의 고백이 우선 같습니다.
고발이 감옥 밖에서 들린다면, 고백은 감옥 안에서 들리지 않는 내면의 외침입니다.
감옥이 밖과 안을 구분한다면, 그 차이를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것은 소리입니다.
밖의 소음이 없습니다.
감옥의 조용함은 그 어느 깊은 산중의 암자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가 감사와 불평이라고 하지요.
나는 차이보다 같음을 봅니다.
밖에서 고발의 소요였다면, 안에서 고요함은 고백의 장소입니다.
안에서의 묵언(默言)은 수행자의 면모이기보다는 죄인의 은밀한 고해(告解)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神父) 아닌 신부(新婦)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