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눈을 뜨자 노랫소리도 끊어졌고 당신의 모습도 사라졌습니다.
당신이 노래 부르던 걸 한 번도 본적도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꿈에서 처음 있던 일입니다.
일어나 당신이 불렀던 노래를 종일 떠올렸습니다. 가사가 전혀 이어지질 못합니다.
아무 말도 말아요.
...
물어보지 말아요
...
돌아보지 말아요.
...
내가 참 좋아했던 노래였습니다.
가사도, 가수의 이름조차도 기억나질 않습니다.
네이버도, 구글도 없으니 답답했습니다. 당신에게 노랫말을 편지에 담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 물어볼 수는 없습니다.
방에 있는 이들에게 물어도 보았지요. 모두 모릅니다. 나조차 제대로 묻지 못합니다. 청년에게 부탁했습니다. 밖에 편지를 써서 찾아봐 달라 했습니다.
‘여가수, 80년대 민중가수, 아무 말도 말아요. 물어보지 말아요. 돌아보지 말아요.’ 그게 부탁의 정보 다였습니다.
그리고 2주 만에 답이 왔습니다. 밖에서는 어떻게 찾아냈나 봅니다.
윤선애,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였습니다.
아무 말도 말아요 지나간 일이라면
수많은 이야기 속에 오해가 너무 많은 걸요
물어보지 말아요. 지나간 일이라면
무슨 대답으로도 진심을 전할 수 없어
그냥 가슴속에 묻어요 하고 싶던 그 말들도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흩어져 간 기억들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그땐 나를 안아줘요
오늘 차마 하지 못했던 미안하다는 말 대신
돌아보지 말아요. 멀어진 사람이라면
웃으며 떠나갔지만 아직도 울고 있을 걸요
기다리지 말아요. 멀어진 사람이라면
어리석은 그리움 미움이 되어 가겠죠
그냥 가슴속에 묻어요. 하고 싶던 그 말들도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흩어져간 기억들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그땐 나를 안아줘요
오늘 차마 하지 못했던 미안하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 대신
당신이 불렀던 노래인 줄 알았는데, 옮겨적고 보니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나 봅니다.
노랫말을 다 적었어도 내 입가에선 종일 ‘아무 말도 말아요... 물어보지 말아요.. 돌아보지 말아요...’만 맴돕니다.
말을 잊고, 끊고 지냅니다.
묵언(默言) 수행이기보다는 그저 무언(無言)의 날들입니다.
Y는 겉봉에는 못 적어도 편지 첫 줄에 교도소 주소를 ‘00 수도원’이라고 적어 보냅니다.
묵언의 수도자(修道者)와 무언의 수인(囚人)이 같을 수야 없겠지만, 다름의 차이를 재어 보지는 않습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 언제나 많습니다.
그는 깊은 산속에 앉아
말을 내려놓았다.
대숲 바람이 그의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도시의 감옥에 갇혀
입을 닫았다.
소음은 나를 삼키고
무수한 벽들이 내 목소리를 지웠다.
묵언의 그,
무언의 나,
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찾았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쌓이는 시간,
그 속에 숨겨진 말들이
어느덧 두꺼워졌다.
어쩌면 그는,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을까?
그 바람의 속삭임으로.
어쩌면 나는,
그에게 대답하고 있었을까?
그 벽의 메아리로.
그러나 우리 둘은 끝내,
침묵의 강을 건너지 못했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언제나 우리 사이에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침묵의 숲에 묻혔다.
묵언의 잎사귀들,
무언의 돌멩이들 사이로.
승자에게 환희는 있어도 ‘깨달음’이 없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내일’을 보장하지만, ‘환희’는 잠시 지나가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패자의 것이며, ‘내일’의 승리를 꿈꾸는 희망의 다른 말이라고 합니다.
‘내일’에 가서 승자가 된다면, 내일의 승리는 ‘환희’의 순간이 아닌, 어제의 회한(悔恨)이 빚어낸 여한(餘恨) 없는 기쁨의 눈물이 될 것입니다.
모든 승자가 패배 없이 이룬 것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승자의 환희는 패자의 깨달음 없는 결과는 아닙니다.
승자와 패자의 눈물이 서로 같지 않아 보여도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꽃을 보고 열매를 따며 좋아하는 눈길과 손길은 이들을 받쳐주는 발길이 밟고 있는 그 나무의 뿌리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무는 그 키만큼의 뿌리를 땅속에 묻어 두고 있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만큼 보이지 않는 조건의 가능성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여유는 바쁜 행동 뒤에 남아도는 것이 아닙니다.
결과 전에 조건을 미리 볼 수 있는 연기(緣起)를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환희보다 깨달음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깨달음’이 꼭 패자만의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환희는 패자의 회한(悔恨)이 낳은 자신의 눈물입니다.
감옥은 회한과 여한의 경계를 넘나드는 곳과 같습니다.
매일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방의 모습에서 나의 지금의 자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탈옥은 갇힌 나로부터의 벗어남입니다.
어젯밤 누운 자리에서 새벽에 일어납니다.
매일 해야 하는 나의 탈옥은 변치 않는 공간의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내(自)가 해야 할(由) 탈옥(脫獄)은 스스로 묶는 것들을 푸는 일들입니다.
보이는 것에만 생각과 마음이 묶여있는 수인(囚人)의 모습을 지우는 일입니다.
사방 벽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철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든든한 뿌리에 대한 믿음을 봅니다.
조건 이전의 모든 규정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남은 삶의 잠재성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지금 여기에 바로 앉아 있게 하는 큰 힘입니다.
명상의 기본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입니다.
자세가 몸이지만 마음자세입니다.
가부좌는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단지 허리를 곧게 세워 앉는 것만은 아닙니다.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좌·우·전·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 중심입니다.
중심은 안정입니다.
안정은 고요입니다.
미추선오(美醜善惡)의 분별심에서 떨어져 앉는 자세입니다.
굳어진 허리가 쉽게 펴지지 않았습니다.
오랜 습성의 굳어짐도 하나씩 하루씩 하다 보니 조금씩 펴집니다.
내가 내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눈을 감고 면벽(面壁)을 하면 산사(山寺)의 고승(高僧)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산사의 대숲 바람이 잦아듭니다.
면벽한 고승은 바위처럼 고요합니다.
숨조차 끊어진 듯 촛불도 멈춥니다.
간밤의 소낙비도 그치고
연잎 위에 고이는 빗물,
고승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햇살마저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의 한 조각이 됩니다.
수백 번 피고 지는 꽃들의 이야기,
계절의 순환마저 그의 귀에는 닿지 않으니
그는 이미 길을 떠난 것일까요,
아니면 그 길 위에 영원히 서 있는 것일까요.
세상은 흐르고 바람은 부는데
고승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우주의 깊은 침묵,
나는 그저 바라볼 뿐,
답을 찾을 수 없으니...
그리고
혼자 소리없이 종일 흥얼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