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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Sep 18. 2024

창살에 걸린 보름달

‘비에 젖은 종이는 내려놓고 학만 날아간다’

갇혀 있어도 갇히지 않고 묶이지 않는 건 시간입니다.

감옥에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새벽에는 코끝이 먼저 계절의 변화를 느낍니다.

엊그제부터 밤에 전등이 흐릿해지면 감옥의 방 안이 환합니다.

한가위가 다가온 둥근달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조차도 고정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춘하추동의 순서가 변하진 않겠지만 지구 어디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겨울일 때, 한여름인 나라도 있고, 그와 반대인 경우도 있는 것을 압니다.

지구상 어디나 동서남북이 없지 않습니다.

상하좌우가 어디나 있으니, 미리 정한 동서남북이라 해도 각자의 동서남북은 언제나 새로 정해질 겁니다.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남의 지점을 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 어느 하나 고정과 불변이란 없습니다.

동·서양의 구분이 그것입니다.

우리 서쪽에 있는 나라들을 중동, 근동이라 부르는 문제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과 판단에 앞서, 내가 서 있는 지점과 시점의 고정과 불변을 개방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남이 미리 정해놓은 나/우리에 대한 고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동서남북의 공간적 다름과 춘하추동의 시간적 차이에 대한 생각이 신약성경 4 복음서로 이어졌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다룬다는 종교의 경전마저도 한 예수, 하나의 복음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믿음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광신입니다.

천지창조에 대해서도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다른 창조신화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다르지 않다고 고집하는 맹신자에게 설득의 노력은 필요치 않습니다.



문제는 다름을 보는 태도입니다.

서로 다른 차이들을 비교해서 각각의 특징과 특성을 찾아내는 분석의 방법이 서구학문의 대표적인 존재론적 태도입니다.

반면에 동양적 사고의 중심은 개별 존재들의 특징을 비교 대상과의 차이와 대조해서 드러내기보다는 서로의 다름이 함께 어울려 전체를 보게 하는 관계론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적 사고가 나무의 존재에 주목한다면, 동양은 나무와 나무가 이룬 숲을 보려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人)과 사람(人)의 관계(仁)를 중요시하는 게 유가(儒家)의 전통이라면, 사람과 자연의 관계는 도가(道家)의 전통이라고 할 것입니다.     

단지 동·서양의 사고에 대한 개론을 펼쳐 보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일상에서 숱하게 벌어지고 있는 대상에 대한 세상의 인식과 판단, 규정과 편 가름에 대한 심각한 문제 인식 때문입니다.

이 또한 남보다는 이전의 내 모습이라는 자성(自省)이 큽니다.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는 종교의 경전조차도 서로 다른 각자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한 자리에서, 한 때에 보았던, 한 면을 갖고서 판단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게 보고, 듣고, 말했던 모든 인식과 판단, 규정을 오래도록 묶어 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적하는 남보다는 오히려 지난날의 나의 말들과 행동들이 필름처럼 지나갑니다.

보수만 지키려는(保) 게 아닙니다.

진보가 더 그렇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남과의 차이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더 진보라고 보이고 싶어서 지 모릅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동양의 관계론적 사고는 불교의 연기론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동서남북, 춘하추동의 공·시간적 일면에 대한 고정된 불변의 인식, 판단도 가능치 않습니다.

한순간도 머무름이 없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란 부분을 확대해서 다름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주체의 자기 의도일 뿐입니다.

앞에 선 사람들, 앞에 서려는 사람들, 앞에 섰다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뒤에서 달리는 사람들은 순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앞, 뒤 그리고 좌, 우의 사람들과 서로 어울려 달립니다.

때론 걷기도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나는 ‘비에 젖은 종이는 내려놓고 학만 날아간다’ 던 지리산에 남겨진 비에 젖은 종이학을 떠올렸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을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구획 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군중들의 행렬과 함성 속에서 나는 광장을 떠올렸습니다.

시인(정호승)의 감성과 이상은 온데간데없고, 곳곳에서 온갖 종이학만 광장으로 날리고 있다고 봅니다.

어차피 날지 못할 종이임을 알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춘풍추상(春風秋霜),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신에게는 추상처럼 엄혹해야 한다는 선현(先賢)들의 말씀이 떠오르는 계절이고 시대라고 보고 있습니다.

경쟁적으로 한 발 더 빠르게 앞서려는 진보의 가벼움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누워서 아직 다 차지 않은 창문 밖 노란 둥근달을 보았습니다.

가로로 2줄, 세로로 4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고대 문명의 중심에는 달이 있었지요.

어쩌면 태양보다 차고, 지는 달이 고대인들에게는 가장 신성시되었을 겁니다.

통치자는 둥근달이 뜨는 날에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묶어 놓으려 했을 겁니다.  사람들의 비는 마음을 자신의 통치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했을 겁니다.



가난한 집일수록 더 높은 산동네에 모여 살던 때, 그곳을 ‘달동네’라고 불렀습니다.

달과 가까운 지대에 살아서 일 것입니다.

단지 동네 지역 이름을 떠나서, 좀 더 가깝고 살갑게 어울려 사는 가난한 이웃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달동네’라고 불렀습니다.

‘달’이 가진 어두운 밤에, 추운 날들에 따뜻함을 주는 이미지 때문일 것 같습니다.

‘달’의 느낌은 무엇보다도 ‘그리움’입니다.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에겐 고향에서 보았던 ‘달’을 혼자 외로운 타지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고향의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움의 실체는 사람입니다.

동그란 얼굴입니다.

그러니 둥근달을 보며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중국의 낭만적 시풍(詩風)의 종주인 이백(李太白), 낙천 백거이(白居易)는 달은 곧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로 노래합니다.


青天有月來幾時(청천유월래기시)

저 푸른 하늘 저 은 달은 언제 생겼나?

我今停杯一問之(아금정배일문지)

이제 술잔을 멈추고 한번 물어보네

人攀明月不可得(인반명월불가득)

사람이 밝은 달에 매달려 얻을 수 없지만

月行却與人相隨(월행각여인상수)

달이 도리어 사람을 따라 흐르는구나!


이백의 파주문월(把酒問月)-술잔을 들고 달에게 묻네, 한 소절을 옮겨 적습니다.


백거이의 단연 최고의 시(詩)라고 불리는 ‘비파행’(琵琶行)에도 다음과 같은 시구(詩句)가 있습니다.


醉不成歡慘將別(취불성환참장별)

취했어도 기쁘지 않고, 떠나보내는 서글픔에

別時茫茫江浸月(별시망망강침월)

헤어지려니 저 달도 아득히 강에 잠기네


내가 시(詩)에 대해 아는 바도 적고, 더욱이 한시(漢詩)에 대해 풀어쓸 나의 말은 바닥입니다. 한시 책에 쓰인 풀이를 옮기기보다는 나의 그리움을 당신이 오늘 밤 달을 보며 느끼는 게 더 어울려 보입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노랫말이 먼저 입가에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달’과 관련해 잊지 못하는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작은 교회를 다녔지요.

어느 밤 날에 기도 모임이 있었어요.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마당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인데, 여기 우리가 모두 한꺼번에 기도하면 어떻게 들으실 수 있나요?”

내가 선생님께 물었지요.

선생님은 친구들 모두에게 각자의 그릇에 물을 담아 오라고 했어요.

그 뒤에 각자 채워 온 물그릇을 쳐다보라고 했지요.

각자의 그릇에는 둥근달이 하나씩 들어 있었답니다.

그때의 선생님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둥근달을 바라볼 때마다 그때의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르곤 합니다.



얼마나 많은 ‘달’과 관련된 시(詩)들이 있을지 잘 모릅니다.

그중에 어떤 것이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인지를 고를 능력도 없습니다.

들어본 적 없는 장약허(張若虛)라는 시인은 단 두 편의 시(詩)만 전한다고 하는 데, 그중 한 편인 춘강화월야(春江花月夜)를 두고, ‘이 시(詩)는 시중의 시요. 최고 중의 최고다’라고 한다네요. “이 시(詩) 앞에서 칭찬하는 말은 말장난이 아니면 모욕일 뿐이다”라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의 시평(詩評) 때문에 좀 더 천천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시(詩)를 여기 모두 옮기기에는 지루할 듯싶어서 마음에 남아있는 한 절만 소개합니다.


不知江月待何人(부지강월대하인)

但見長江送流水(단견장강송류수)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옮겼습니다.

저 달은 누구를 기다리는가?

강물은 한없이 흘러가는데


어려운 한자가 없어서 내 식으로 옮겨 보았습니다.

강물 위에 저 달은 누구를 기다리나 알 길이 없고

보이는 건 다만, 긴 강은 물만 흘려보내는구나!     


시인은 강둑에 올라서서 강물에 달이 비친 모습을 봅니다.

시인은 떠나 버린 임을,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합니다.

강물은 흘러 흘러가지만, 강물 위에 떠 있는 달은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춘강화월야(春江花月夜) 전체를 다 외울 수야 없지만, 위의 두 구절만이라도 외우고 싶습니다. 옥편에 나온 건 대충, ‘뿌지 쨩웨 따이 허롄 / 딴 치엔 창 쨩 송 리우 쉐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중국 사성 발음으로 외운 뒤에 당신과 함께 어느 달밤, 북한강에 가거든 멋지게 한 수 뽑아보고 싶습니다. 방통대 김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올겨울에 처음으로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겨울이 다시 올 겁니다.

올겨울에 만났던 겨울과는 많이 다를 듯합니다.

모든 게 낯설고 서툰 게 처음입니다.

그도 겪다 보면 익숙해지겠지요.

친근까지는 아닐지 모릅니다.

올겨울 시작엔 처음으로 봄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추위에서 따스함의 기다림이 아닌 단지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그저 다가오는 겨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겨울 초의 애탐은 크지 않습니다.

가을은 감옥에서 더욱 독서의 계절입니다.


세상에 철 모르는 것 하나가 꽃일 겁니다.

봄·여름·가을·겨울 때마다 꽃이 없는 때가 없습니다.

동토(凍土)의 한겨울에도 가지마다 피어나던 백설(白雪)의 눈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배달은 못 해도 당신께 이 가을에 국화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다산(茶山) 때문입니다.

국화를 방안에 들여와 그 앞에 촛불을 켜서 벽에 흔들거리는 국화의 그림자를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국화는 여러 꽃 가운데 유달리 뛰어난 네 가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늦게 꽃피는 것이 하나이고, 오래도록 견뎌 내는 것이 둘이고, 향기로운 것이 셋이고, 곱지만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싸늘하지 않은 것이 넷이다. 세상에서 국화를 사랑해 이름을 얻고, 또 국화의 취향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 역시 이 네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네 가지 외에 또 다르게 국화를 사랑한다. 그것은 촛불 앞에 어린 국화의 그림자다. 밤마다 꽃 그림자를 위해 담장 벽을 깨끗하게 쓸고 등잔불을 켠 다음, 그 가운데 쓸쓸히 앉아 홀로 즐기곤 한다.” -여유당전서 1집 13권-국영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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