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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Aug 17. 2024

‘가위, 바위, 보’

Yes I would, if I could, I surely would.

손가락 두개를 앞을 향해 뻗어라 엄지 하나 검지 하나 조그만 주먹을 기운차게 뻗어라 마음속을 꼭 쥔채로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아무나 이겨라 활짝핀 그 손을 멀리멀리 뻗어라...

‘가위, 바위, 보’를 생각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종종 합니다.

승과 패를 가르고 선과 후를 정해줍니다. 올림픽 메달과 전쟁의 승, 패를 두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놀이’입니다.

잠시 후를 알 수 없는 긴장은 있지만, 불안에 떨지는 않습니다.

미지(未知)를 밀치고 선택과 결정을 내밉니다.  

운(運)에 기대는 마음이야 남도 나와 다르지 않은 처지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 ‘놀이’의 묘미는 승패의 확률이 같다는 데 있습니다.

이기고 질 경우만 아니라 비길 확률도 같습니다.

‘놀이’의 부담이 적은 것은 확률이 같아서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혹시 모를 패로 인한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알아서 ‘놀이’에 기꺼이 끼어들게 합니다.

이것이 미지의 미래에 선 뜻 자신을 맡기는 가장 자유로운 행위라고 봅니다.     



‘보’가 없는 놀이라면 어떨까요?

누구나 주먹을 꼭 쥐고 ‘바위’만을 내밀 겁니다.

끝나지 않는 게임이 됩니다.

더는 ‘놀이’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아예 시작조차 없을 겁니다.

‘보’가 있으니 주먹을 선뜻 내밀기가 주저됩니다.

단지 ‘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가위, 바위, 보 이 셋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놀이’란 없습니다.

‘보’가 있어서 ‘주먹’ 쥔 손을 감히 내밀 용기가 없습니다.


반드시 이긴다는 마음에 ‘주먹’ 쥔 손을 풀지 않고 내미는 ‘보’가 없는 세상과

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먹’ 쥔 손을 내밀기를 주저하는 ‘보’가 있는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주먹을 내서 이겼다고 그다음에 또 주먹으로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가위, 바위, 보 어느 하나 승, 패의 영원한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만의 집착이 오래되면 언제나 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무상(無常)의 놀이입니다.


‘가위, 바위, 보’는 서로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각각의 선택이 다른 두 선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위는 바위에, 바위는 보에, 보는 가위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


불교의 연기(緣起)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와 사건은 서로 의존하며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독립된 실체로 변하지 않는 존재란 없습니다.

천운(天運)과 숙명(宿命)을 끄집어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앞일에 대한 고민에 시달릴 이유를 내려두려는 마음입니다.

오직 ‘바위’만을 고집하려고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합니다.

손을 풀면 땀이 차지 않습니다. 마음조차 풀립니다.


‘가위, 바위, 보’는 가벼운 ‘놀이’ 여야만 할까요?
무거운 삶의 자리마다 ‘가위, 바위, 보’를 하면 안 될까요?
과연 할 수 있을까요?
무거움을 가볍게 처리할 수는 없을까요?
무거움과 가벼움을 잴 수가 있을까요?


모든 싸움에 없는 것은 쉬운 인정입니다. 그

래서 니체는 이기려면 압도적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패자의 억울함을 덜어내는 일입니다.

‘가위, 바위, 보’처럼 패자의 인정이 쉬운 게 없습니다.

억울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재판에 억울하지 않다는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사가 서로 ‘가위, 바위, 보’를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자고, 그러기를 바라는 말은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게 말이 되는 세상이 의외로 많아서 그렇습니다.

‘가위, 바위, 보’가 연기(緣起)라는 것을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잘 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손글씨로 편지를 쓰면 고쳐쓰기가 어렵습니다.

며칠 전 수정액을 구했습니다.

편지지에 하얀 덧칠이 군데군데 생겨났습니다.

편지지가 얼룩져 보였습니다.

수정액을 없앴습니다.

혹 오타가 나면 지우지 않고 그 글자로 이어갑니다.

없던 마음이 생겨나고 새로운 글이 만들어집니다.

부족과 결핍은 그것으로 새로운 창조의 자양(滋養) 임을 깨닫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고난과 비극은 꼭 그만큼의 기쁨에”까지 읽고 다음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예상과 달리 이어지는 글은,

“의해서만 극복되는 건 아니거든요. 작은 기쁨에 의해서도 충분히 견뎌져요”였습니다.

반전입니다.

예상과 기대는 ‘가위, 바위, 보’와 같습니다.


독서의 선택이 가벼운 ‘놀이’는 아닙니다.

내가 읽을 것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입니다.

감옥에서 ‘작은 기쁨’이 ‘희극’에서 찾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비극’을 읽는 것이 기쁨을 얻기보다 슬픔을 잠재우고 싶은 마음에서 입니다.

큰 나무 그늘에 들어가야 그림자가 사라진다는 것에 기대는 마음이지요.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라고 들려주는 시인을 옆에 두고 있습니다.



말(言)을 다 하지 않는 시(詩)는 못다 한 말(說)이 없다고 합니다.

노자가 ‘그릇이 비어있음으로 그 쓸모를 다한다’고 한 말(文)이 생각납니다.


어제 읽은 책에 밑줄을 그어 놓았는데 오늘 당신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나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걸음들이 많다고 전해준 당신의 소식에 울컥하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좋은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좋은 친구가 아니다.” 명대(明代)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말에 그은 밑줄입니다. ‘친구’와 ‘스승’에 대한 이해와 차이가 단지 ‘수평’과 ‘수직’의 관계만은 아닌 느낌입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던 한유(韓愈)는 ‘스승이란 길(道)을 가리키는 사람’이라고 했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나는 ‘길’(道)을 가르치거나 가리키기보다는 함께 걷기를 좋아했습니다. 긴 산행을 함께 가곤 했지요.



가을은 도보(徒步)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도보’(徒步)는 ‘도로’(道路)에서 내려서 ‘길’(道)로 들어서야 합니다.

‘도보’(徒步)는 ‘길’(道)에서 걸으며 ‘사색’(思索)하는 것입니다.

가을은 ‘도보’(道步)의 계절입니다.

감옥에서는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무작정 걷는 꿈을 자주 꾸곤 합니다.

깨어서도 ‘훗날엔 마냥 걸어야지’라고 꿈을 꿉니다.


“나뭇가지 끝을 떠나지 못하는 달팽이보다는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참새가 되고 싶고, 못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다.”



사이먼과 가펑클이 노래한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에 나오는 노랫말입니다.

신 선생님 글에서 감미로운 노래를 듣습니다.

가사를 다 기억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길보다는 숲이 되고 싶다’라고 끝이 난다고 합니다.

달팽이보다는 참새가 되고 싶고, 박힌 못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다더니, 끝이 없는 길, 막힘이 없는 자유를 향해 뻗은 그 길로 떠나지 않고, 지금의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든든한 나무가 되어 함께 숲을 이루겠다고 합니다.

“갇혀있던 나로서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비록 떠날 수는 없지만 숲은 만들 수 있겠다는 위로였고, 동시에 감옥의 가능성이기도 하였다”라고 선생님은 회고합니다.

무기수(無期囚)였기 때문이었을까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내 자리에서 숲을, 나무를 아니 뿌리를 내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였습니다.

달력의 날짜만을 세고 있던 나를 봅니다. 뿌리를, 나무를 그리고 숲을 이루는 일은 세월만이 아닙니다.

지금의 생명을 이어나가는 일입니다.

나가서 걷고 싶다던 꿈과 마음이 들떠 있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가 반복되며 귓가에 맴돕니다.

“Yes I would, if I could, I surely would,

그래 그러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어”


감옥에서는 읽을 수 있는데,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내면 들립니다.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잘 들릴 때가 많습니다. 통을 비워야 소리가 납니다. 범종 속을 쇳물로 가득 채우지 않습니다.

마음도 비우면 들립니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도,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도,

자클린의 첼로 선율도 들립니다.


돌아가면 오디오 크게 틀어 놓고 듣고 싶습니다.


“Yes I would, if I could, I surely would, ... Yes I would, if I could, I surely wou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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