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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Oct 18. 2024

이름과 번호

찡~

감방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입니다.

감옥에도 전자화가 되어 ‘철커덩’ 아날로그의 시대는 아닙니다.

누군가 들어오거나 누군가 나간다는 신호입니다.

감옥의 철문은 정해진 운동시간이 아니면 종일 닫혀 있습니다.

그 시간 외에 찡~ 소리가 나니 모두 고개를 돌립니다.

안에 있는 누가 나갈지를 점치는 순간입니다.

철문이 아니라 나를 쳐다봅니다.

5명이 꽉 차 있으니 새로 들어올 신입은 없습니다.

갑자기 출정을 나갈 이도 없습니다.

접견을 오는 이는 방 안에 나뿐입니다.

잠시 후 교도관이 와서 나를 지명했습니다.



“000 씨 전방~~”


재소자들은 교도관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수용자를 번호로 부르는 사람과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입니다.

수용자들은 모두 명찰을 달고 있습니다.

한쪽 가슴에는 방 번호와 다른 쪽 가슴에는 수용자 번호입니다.

명찰에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붙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군대 훈련소 때의 일입니다.

교관은 훈련생들을 번호로 불렀고, 훈련생 모두는 자신의 번호가 불릴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처음 호명에 답하지 않고 두 번, 세 번째 호명에 걸린 훈련생은 교관의 군홧발에 걷어 치이곤 했습니다. 훈련생 모두는 자신의 번호가 불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름은 사라졌고 번호는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교관 자리에 교도관이 서 있습니다.

또다시 아침마다 저녁마다 번호를 부릅니다.

밖에서 본인 확인 때마다 서명란에 이름 석 자를 적었습니다.

안에서는 번호를 적습니다.

동명이인이 있을 순 있지만, 같은 번호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름보다 번호가 본인 확인이 더 분명할지 모릅니다.

이름 대신 번호를 적을 때마다 내 이름을 잊어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이름을 잊는 날이야 없겠지만, 더는 들리지 않을 날이 올 것은 압니다.

안에 있는 나를 밖에서 찾을 일은 없겠지요.

밖에서 점차 잊혀가는 나의 이름을, 안에서는 번호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번호를 붙이고 처음으로 당신을 접견하러 갔던 날이 힘들었습니다.

내 번호가 스피커로 호명되고 지명된 번호를 찾아 접견실로 들어갔습니다.

나를 찾은 당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게 한 것은 나의 번호였습니다.

번호를 따라갔지만 큼직하게 가슴에 달린 내 번호는 내 마음을 짓누르며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수치하지 않은 밝은 얼굴빛이었지만, 번호만큼은 가리고 싶었습니다.

내 번호가 나를 대신해서 보일 것을 떼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내 얼굴만 보았습니다.

당신의 눈에 내 번호가 안 보일 리 없었겠지요.

접견을 마치고 접견실에서 감방으로 돌아가는 긴 복도를 걸으며 나는 내 번호를 떼고 싶었습니다.

그날의 일기장에 적었던 글입니다.



오늘도 번호로 불렸다. 어제와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방식으로. 처음엔 불쾌했지만, 이제는 그저 무감각해질 뿐이다. 나는 번호다. 이름은 사라졌다. 집에서, 동네에서, 길에서 들었던 이름이 더는 들리지 않는다. ‘내 것이면서 남들이 쓰는 것은?’ 어릴 때 냈던 수수께끼의 답을 잃어버렸다. 이제 남들도 내 것을 쓰지 않는다.
번호가 나를 부르면,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다시 그 번호 속으로, 그 익명의 세계로 돌아간다. 아침에 거울을 보았을 때, 얼굴보다 먼저 번호가 보였다. 이제 나도 나를 번호로 본다. 번호는 나를 불러들이지만, 그 번호 속에 나는 없다. 어제의 추억도, 내일의 꿈도 없다.
아니다. 여기서 번호는 나다. 내 번호를 잊지 않아야 한다. 들어와서 가슴에 달린 번호만이 밖으로 나가게 할 수 있다. 그날에야 번호를 가슴에서 떼어낼 거다. 내 번호를 불렀을 때 나는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돌아가고 나도 돌아왔다. 가리고 싶었던 번호를 떼어내지 못하고 여전히 가슴에 달려있다. 달고 있어야 다음에 다시 아내를 만나러 갈 수 있다. 여기서 번호는 가장 소중한 나다.
번호는 순서다. 이탈할 수 없는 대열이다. 개인이 아니라 단체다. 체계 속의 하나의 부품일 뿐이다. 나의 존재는 이제 그들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나는 더는 나 자신이 아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름이 사라진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지만, 답은 없다. 오직 빈 숫자만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이름이다. 이름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 번호도 고유성을 갖게 되면 개체성을 띤다. 이름이나 번호나 기호다. 번호는 나열의 순서를 따른다. 단체 안에서 오와 열을 갖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름은 내(自) 존재 이유(由)고, 번호는 자유를 지운 감옥이다. 번호로 불릴 때마다 자신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낀다. 번호로 앉고 일어설 때마다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사라진다. 이름 석 자는 점점 흐릿해지고 숫자 네 개는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 점점 더 수인(囚人)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여전히 나를 찾아 헤맨다. 번호의 그늘 속에서, 이름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나일지 모른다.
000 내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 묻는다. 000 너는 누구/무엇이냐?
0000 내 번호를 적는다. 그리고 묻는다. 0000 너는 누구/무엇이냐?



“000 씨 전방~~”

교도관이 와서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씨’ 자를 붙여서입니다.

내가 특별해서는 아닙니다.

그 교도관입니다.

그는 수용자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부류입니다.


감옥에서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이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가리는 배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름 없는 사람이 없지만, 유명(有名)한 수인(囚人)에겐 번호로 불리기를 좋아할 것 같습니다.

대다수 수용자는 번호보다 이름이 불리기를 바랍니다.

수용자들끼리 번호로 부르는 일은 없습니다.

재소자가 다른 교도소로 이사 가는 것을 이송(移送) 또는 이감(移監)이라고 합니다.

같은 교도소 내에서 방을 옮기는 것은 전방(轉房)이라고 합니다.

기결수로 확정되면 미결수 방에서 기결수 사동으로 옮기는 감옥 내의 이사입니다.


찡~ 소리가 나자 나 일 줄 알았습니다.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아무 생각 없다가 갑자기 닥치는 일에 마음의 문이 철커덩합니다.

감옥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일은 내(自)가 정하는(由) 일이 아닙니다.

이사라고 하지만 두 손에 들면 이삿짐이 전부입니다.

마음의 요동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로 갈지 보다 누구를 만날 지에 대한 작은 두려움 같은 게 있습니다.

그래도 처음 감방 안으로 들어섰던 날과는 사뭇 다릅니다.

두려움도 겪다 보면 무뎌지나 봅니다.

길들고 무뎌지면 주저앉고 고여서 썩을 수 있습니다.

변화는 무지의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기대여야 합니다.

옥담을 벗어나진 못해도, 방 하나 옮기는 나의 변화는 옥문을 나가는 날로 한 걸음씩 다가서는 기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감방에 함께 있던 이들과 짧은 인사를 남기고 이사를 했습니다.

좁은 방을 나오면 번호를 세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운동하러 나가서 작은 텃밭 같은 뒷마당 옥담을 끼고 걸으면서 셌습니다.

하나, 둘, 셋...

접견실에 가고 돌아올 때도, 하나, 둘, 셋...

목욕실에 다녀올 때도, 하나, 둘, 셋...

출옥을 준비하는 속셈도 없이 그냥 세곤 했습니다.

전방을 가는 걸음에서도 셌습니다.

좌회전, 하나, 둘, 셋...

우회전, 하나, 둘, 셋...

직진, 하나, 둘, 셋...


5명이 어깨를 대고 잤던 방에서 10명이 있는 방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만 있는 화장실의 크기는 같습니다.

한쪽 가슴에 새로운 방 번호로 갈아 달았습니다.

다시 새 번호를 외웁니다.


감옥에서 소개는 짧습니다.

죄명과 형기가 이름과 나이보다 나를 알립니다.

화장실 문 앞에 자리를 잡습니다.

감옥에서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없습니다.

나이는 감옥에 들어오면서 영치(領置)한다고 합니다.

밤에 자리를 펴는데 80이 다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왔습니다.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꽉 잡아주기만 했습니다.

부스럭 소리가 났습니다.

아직 기상 시간이 두 시간이나 남았습니다.

옆자리 어르신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습니다.

자는 척 실눈을 떠서 보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앗! 하고 소리를 칠 뻔했습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책을 읽고 있습니다.

누운채로 몸을 돌려 눈을 떴습니다.

초겨울 담요 한 장의 추위 안이 훈훈해졌습니다.

‘잘 왔다’ 혼잣말을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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