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관은 훈련생들을 번호로 불렀고, 훈련생 모두는 자신의 번호가 불릴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처음 호명에 답하지 않고 두 번, 세 번째 호명에 걸린 훈련생은 교관의 군홧발에 걷어 치이곤 했습니다. 훈련생 모두는 자신의 번호가 불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름은 사라졌고 번호는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번호로 불렸다. 어제와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방식으로. 처음엔 불쾌했지만, 이제는 그저 무감각해질 뿐이다. 나는 번호다. 이름은 사라졌다. 집에서, 동네에서, 길에서 들었던 이름이 더는 들리지 않는다. ‘내 것이면서 남들이 쓰는 것은?’ 어릴 때 냈던 수수께끼의 답을 잃어버렸다. 이제 남들도 내 것을 쓰지 않는다.
번호가 나를 부르면,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다시 그 번호 속으로, 그 익명의 세계로 돌아간다. 아침에 거울을 보았을 때, 얼굴보다 먼저 번호가 보였다. 이제 나도 나를 번호로 본다. 번호는 나를 불러들이지만, 그 번호 속에 나는 없다. 어제의 추억도, 내일의 꿈도 없다.
아니다. 여기서 번호는 나다. 내 번호를 잊지 않아야 한다. 들어와서 가슴에 달린 번호만이 밖으로 나가게 할 수 있다. 그날에야 번호를 가슴에서 떼어낼 거다. 내 번호를 불렀을 때 나는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돌아가고 나도 돌아왔다. 가리고 싶었던 번호를 떼어내지 못하고 여전히 가슴에 달려있다. 달고 있어야 다음에 다시 아내를 만나러 갈 수 있다. 여기서 번호는 가장 소중한 나다.
번호는 순서다. 이탈할 수 없는 대열이다. 개인이 아니라 단체다. 체계 속의 하나의 부품일 뿐이다. 나의 존재는 이제 그들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나는 더는 나 자신이 아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름이 사라진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지만, 답은 없다. 오직 빈 숫자만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이름이다. 이름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 번호도 고유성을 갖게 되면 개체성을 띤다. 이름이나 번호나 기호다. 번호는 나열의 순서를 따른다. 단체 안에서 오와 열을 갖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름은 내(自) 존재 이유(由)고, 번호는 자유를 지운 감옥이다. 번호로 불릴 때마다 자신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낀다. 번호로 앉고 일어설 때마다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사라진다. 이름 석 자는 점점 흐릿해지고 숫자 네 개는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 점점 더 수인(囚人)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여전히 나를 찾아 헤맨다. 번호의 그늘 속에서, 이름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나일지 모른다.
000 내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 묻는다. 000 너는 누구/무엇이냐?
0000 내 번호를 적는다. 그리고 묻는다. 0000 너는 누구/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