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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Nov 07. 2024

미결(未決)과 기결(旣決)

‘여긴 살림집이다.’

기결수(旣決囚) 사동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 것입니다.


누구라도 감옥에서 오래 살고 싶은 이는 없습니다.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未決囚)는 나가고 싶은 희망을 쥐고 늘 불안해합니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들은 희망을 놓은 대신 불안을 지운 사람들입니다.

미결수 사동의 작은 감방은 살고 싶지 않은 방입니다.

기결수 사동의 감옥은 살아야 하는 방입니다.

살아야 하기에 살림집입니다.


못 보던 것들이 많습니다.

아니 미결수 사동에서도 보았던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분해되고 맞추어져서 새로운 것들로 곳곳에 붙어있고 놓여 있습니다.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화장실이어도 기결수 사동은 공중화장실과 다릅니다.


미결사동에 있던 이들은 감방에 들어온 날들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기결사동에 있는 이들은 이제 막 형이 확정되어 새로 들어온 나와 같은 달수부터 1년에서 10년이 넘는 이들도 있습니다.

미결수들은 언제 나갈지를 모르고 삽니다.

기결수들은 자신의 나갈 날을 알고 삽니다.

다음 달에 나간다는 이도 있습니다.

이제 들어온 나보다 수년을  먼저 들어온 이가 내가 있을 날보다 더 오랜 년수를 남겨 놓은 이들도 있습니다.

살아야 하는 곳에서 저마다 살아갈 방책들을 마련하고 삽니다.

각자 살림의 가짓수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미결사동이 감방이라면 기결사동은 감옥입니다.

미결수들은 방 안에 갇혀 있지만, 기결수들은 옥에 갇혀 있습니다.

미결수는 앉아 있지만, 기결수는 감방을 나와 옥담 안에서 걸을 수 있습니다.

혼자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징역(懲役)살이는 일(役) 해야 해서 감옥 내 공장으로 매일 출역(出役)을 나갑니다.

미결수가 누리지 못하는 자유의 도보입니다.

미결사동의 운동장이 텃밭 같은 뒷마당이라면, 기결사동의 운동장은 축구장 크기입니다. 크기만 그렇지 잔디가 깔린 것은 아닙니다. 트랙도 없고, 관중석 스탠드가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여기 좋다’는 말을 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나의 변화와 과정이 당신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감옥에 오니 실존에 대한 생각들을 나도 모르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없이 나오는 것은 아닐 겁니다.


처음 보는 선가(禪家)의 공안(公案) 한자들에 하이데거가 만든 독일어 신조어들이 섞이는 느낌들이 많습니다.

알 수 없는 정답들을 찾아 헤매지는 않습니다.

내가 찾았다고 해도 정답과 맞출 수 없는 여기입니다.

보고 느끼는 것들뿐입니다.


미결수는 나가고 싶어서 어제의 반성문을 씁니다.

기결수는 살아야 해서 오늘의 일기를 적습니다. 그리고 내일 할 일을 메모합니다.

미결수는 어제를 후회하고, 기결수는 내일을 희망합니다.

미결사동에서는 ‘왜 왔니?’로 물어보고, 기결사동에서는 ‘뭐 할래?’를 주고받습니다.

미결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라면, 기결수는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같습니다.


미결수가 ‘현존재(Dasein)’로서 살아 있다면, 기결수는 ‘현존재(Dasein)’로서 살아갑니다.

불가(佛家)에서 불변(不變)의 존재가 없다는 말은, 화이트헤드가 존재의 본질을 변화의 연속된 과정(過程)이라고 본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창조성’입니다.

기결사동의 살림집은 무(無)에서 유(有)는 아닙니다.

유가 유를 만듭니다.

만들어야 하기에 만드는 생존의 진화입니다.

불가의 연기(緣起)를 깨닫게 합니다.

처음 보는 것들에 신기해하곤 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던져진 존재(Geworfenheit)’가 감옥의 실존처럼 다가옵니다.

미결이 열려 있고, 기결이 닫힌 고정일 줄 알았습니다.

며칠을 보내고서 기결(旣決)이 나 없이 정해진 피동의 고정으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번뜩임이 있습니다.

미지(未知)의 불확실성에 기대는 미결(未決)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습니다.

기결의 확정이 ‘던져짐’이라면, 이제 살아갈 형기(刑期)에 나의 창조성을 만들어 나갈 연기(緣起)의 과정(過程) 속으로 던져진 것입니다.

기결사동은 창조를 위한 질료입니다.

구속은 출소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출소후가 구속전으로의 회귀는 아닙니다.

과정은 ‘던져진’ 것이 아니라, ‘던져야 하는’ 연기의 조건입니다.

지금 나의 ‘던져진’ 자리는, 이제 내가 새로운 실제로 변화해 가는 과정과 여정입니다.

감옥은 자유의지를 창조해가는 발현의 자리라는 생각입니다.



감방의 밤에 단상의 촛불 하나 밝히고 싶습니다.

푸른빛의 새벽이 오기 전에 꺼지고, 꺼지기 전에 잠이 들겠지요.

    

사방 벽에 바람도 없어

촛불마저 꼿꼿하다.

달빛만 창살 사이로 자유롭다.

촛불이 흔들리는 틈 사이로

달빛은 촛불의 어두운 그림자로 드러난다.   

  

미결은 흔들리는 촛불이었지

어둠과 달빛 사이에서 떨며

푸른 새벽을 기다렸지

소리 없는 가느다란 숨결에 흔들렸던

미결은 촛불의 흔들림,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불꽃의 길.

희미한 빛 속에 흔들리던 미지(未知)의 불안

존재의 가벼운 속삭임이었어     


기결은 바람이 지난 후 떨군 나뭇잎처럼

간밤의 서슬이 맺힌 이슬에 젖어

흔들리지 않는 깊은 뿌리를 덮는다.     

미결의 불안은 답을 찾는 분주함

기결의 고요는 답이 없는 묵언(默言)

미결의 흔들림

기결의 떨림

미결의 울음

기결의 울림, 울림, 울림

징, 징, 징...

둥, 둥, 둥...


보름달이 떴나 봅니다.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습니다.

달이 뜨기 전에 울렸을 산사(山寺)의 범종 울림이 여전히 가슴에 미동 치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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