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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Nov 11. 2024

반쯤 감아보자/떠보자

‘눈은 정작 눈썹을 보지 못한다.’

보이는 것들만 인정하던, 보는 것만 고집했던 것을 반성케 합니다.


종이 신문을 봅니다.

종교신문만 무료입니다.

지적 호기심에 잡은 게 불교신문입니다.

알고 싶어 잡은 것이 아는 게 없어 읽는 게 더딥니다.

한글조차 모르는 말들이 많습니다.

내가 즐겨보는 것은 ‘암자기행’입니다.

암자(庵子)는 몰라도 산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추억의 반가움이 있습니다.



신문 책 광고를 보고 이진경, 『불교를 철학하다』를 주문해 어제 받았습니다.

내가 아는 그이라면, 제목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었다. 또한 가장 심오한 책이며, 가장 고준하며, 가장 유머러스한 책이었다. 동시에 가장 황당한 책이었다.”


책을 펼치자 나온 다른 책 소개입니다. 『벽암록』


저자와 책 제목만 보고 주문했던 또 다른 책은 도올 선생님의 『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입니다.

그랬구나. 「이 책에 관하여」는 『벽암록』에 대한 풀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한여름 우중 산행하다 배낭 깊숙한 곳에서 젖지 않은 담뱃갑을 발견한 듯했습니다.

“불교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깨달음의 삶의 현장의 이야기를 간접체험으로 듣는 것이다. 그러한 삶의 이야기를 禪에서는 公案이라 부른다. 그러한 공안의 모음집으로 고금에 가장 뛰어난 책으로 우리는 『벽암록』을 꼽는다.”


불교신문을 읽다 보면 왠지 소화가 덜 된 느낌이 있었는데, 소화제 두 통을 받은 기분입니다.

‘다음은 벽암록이다.’


‘다음’을 정하는 것은 ‘지금’을 미루는 게 아닙니다.

‘지금’을 알아야 ‘다음’을 정할 수 있습니다.

‘다음’을 내다보려면, ‘지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을 보는 일은 내일을 보려는 눈을 가늘게 뜨는 일입니다.

반개(半開)입니다.

눈썹을 보는 일입니다.

‘지금’의 바닥은 ‘다음’의 도약을 위한 디딤입니다.

‘다음’을 알지 않고 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습니다.


책마다 ‘들어가는 말, 서언, 머리말/글’이 앞 장을 차지합니다.

도올은 이를 「喝」이라 썼습니다.

꾸짖을 갈(喝) 자는 ‘성낸 목쉰 소리’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도올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승(禪僧)들의 공안(公案)을 할(愒)이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도올의 「갈/할」은 자신만의 득도를 갈파(喝破)하는 듯하고, 청중/독자의 갈채(喝采)를 점지하려나 봅니다.

공갈(恐喝)일지는 미리 알지 못합니다.

“불교는 결코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 종교이기전에 각(覺)(깨달음)이요, 깨달음이란 인간의 삶의 가장 근원적 물음이요 성찰이다.”


신 선생님은 “성찰(省察)이란 철학적 추상력(抽象力)과 문학적 상상력을 양 날개로 하는 자유로운 비상(飛翔)이며 조감(鳥瞰)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린 새가 한 번에 비상할 수는 없지만, 첫 비상은 한순간일 겁니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점수(漸修)와 돈오(頓悟)는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린 새의 비상은 점수에서 돈오로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성(反省)이 멈추어 뒤돌아보는 느낌이라면, 성찰(省察)은 지금의 자리를 뛰어올라야 하는 것 같습니다.

살피는 일은 둘 다 눈(目)을 가늘게(少) 뜨는 일입니다.

모든 불상이 반개(半開)의 시선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를 한자로 줄이면 조감(鳥瞰)입니다.

연기(緣起)의 조건은 비상(飛翔)입니다.

선생님은 양 날개를 철학과 문학이라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고전(古典)을 손에 놓지 않고 있으니 아직 길을 잃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양손에 갖고는 있지만, 아직 날개가 되어 있진 못합니다.


어제의 골목을 답습하다 목이 잘린 김유신의 말이 떠오릅니다.

어릴 적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장군을 욕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어제의 골목을 걷고 있는 자신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했습니다.


현실의 내성(耐性)이 쌓이면 결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바쁜 일상의 골목들에서 뒤돌아보거나 멀리 바라다볼 이유와 여유를 갖지 못하고들 삽니다.

다치고 아프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가늘게(省) 살핍니다(察).

밖에서는 가끔이겠지만, 안에서는 일상입니다.


성찰은 탁한 고인 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모습입니다.

성찰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다고 봅니다.

자세히 살피는 일에는 이성과 객관의 총합입니다.

타자가 대상일 때 그러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성찰은 그만큼 객관성을 잃고 보편적 과학으로서의 보장을 얻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자기 성찰이 쉬운 게 아닙니다.


날개도 없이 비상은 현실 불가입니다.

새는 날기 위해 뼈도 비운다고 했습니다.

비우면 ‘혹시’를 시험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 ‘혹시’란, 실험의 여유로는 아닙니다.

'필시' 치러야 할 형기(刑期)와 다르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철학과 문학의 양 날개가 은유만은 아니어야 합니다.

높은 옥담을 휘어져 날아가는 새를 보고만 있어야 해서 더욱 그렇습니다.

옥담 위 햇실이 눈부셔 손등으로 반쯤은 가려야 합니다.

반쯤 감아도  될 일을 아직 다 알지 못하고 여전히 손을 먼저 쓰나 봅니다.


감옥에서 탈옥의 비상을 꿈꾸지 않습니다.

비상 없는 조감이 없겠지만,

감옥에서 자기 성찰의 조감(鳥瞰)은 반개(半開)로 바라볼 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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