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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Nov 19. 2024

점심(點心)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방은 눈 내리는 겨울밤 좀처럼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사평역 대합실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한자리에 모인 이마다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대합실로 들어서기까지 걸어온 각자의 길들이 다른 까닭입니다.


감방이 대합실과 다른 건 스스로 찾아 들어온 이는 없습니다.

등장인물이 모두 남자들인 것도 다릅니다.

모두가 한 막차에 올라타는 게 아닌 것도 사평역과 다릅니다.

그래도 톱밥 난로 주위에 바짝 달라붙어 좀처럼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만큼은 왠지 닮아 보입니다.


말 없는 이들을 말없이 쳐다보다 저마다의 ‘까닭’을 글 없이 그려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영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줄거리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제목의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던 기억만큼은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

영화 내내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왜, 동쪽일까?’, ‘달마가 왜?’

달마 다큐가 아닙니다.

질문에 발목을 잡혀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 답도 없이 영화도 잊었고, 질문도 잊었습니다.


『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가 오래전 그 영화를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아니 영화가 아니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질문 앞에 섰습니다.

해답집도 없이 혼자 답지를 써 내려갑니다.

답을 질문에서 찾으면 안 됐습니다.

전에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를 들었던 겁니다.

늪에 빠지면 발버둥 치면 안 됩니다.

늪은 무게의 중심을 끌어당깁니다.

몸의 중심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팔을 벌리고 몸을 눕혀야 합니다.

늪 안에는 디딜 게 없습니다.

늪 안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늪에 빠졌을 땐, 늪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질문에 빠지면 질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질문에 빠지면 질문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중국으로 간 달마를 인도에서 답을 는 게 아닙니다.

인도에서 온 달마를 중국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연역적 노정에 있지 않습니다.

동쪽으로도 서쪽에서도, 그리고 달마도 늪입니다. 코끼리입니다.

길을 가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그 "까닭"입니다.

영화에서 달마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감옥에서 힘든 날들을 채운 것은 ‘왜?’ 였습니다.

‘왜?’에 빠진 날의 끝마다 답은 없었습니다.

답도 없이 ‘왜?’는 또 다른 ‘왜?’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왜?’가 늪이라는 걸 깨닫는 날들입니다.

‘왜?’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왜?’에 빠지지 않는 일입니다.


‘까닭’을 찾으려다 시인의 마지막 말을 노트에 적습니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오늘은 내가 읽은 책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오래전 마음먹고 시작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름들이 어려워서 시작만 몇 번을 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요즘 읽고 있는 불교책들에 나오는 선종(禪宗) 스님들의 이름들도 그렇습니다.

한자 두 자로 되어 있어 러시아 이름보다 짧지만, 1대, 2대, 3대... 계보의 순서를 오래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스님이 한 스님에게 말했다.’로 읽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남는 건 ‘A가 B에게 말했다.’입니다.

덮지 않고 읽다 보면 표도르 파블로비치, 드미트리(미챠), 이반(바냐), 알렉세이(알료샤), 스메르쟈코프(파벨) 그리고 조시마 장로의 모습들이 움직입니다.

이름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덕산(德山) 스님이 길을 가다 노상에서 음식을 팔고 있던 노파를 만납니다.

때마침 점심때라 시장기가 있었지만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노파가 스님에게 무엇을 갖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금강경(金剛經)’이 있다고 했습니다.

노파는 금강경 이야기를 들려주면 점심을 거저 주겠다고 했습니다.

덕산이 금강경 이야기를 꺼내려 들자, 노파가 말합니다.


金剛經 道, 금강경에 이르기를,

過去心不可得 과거심불가득,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現在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未來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 미래의 마음 또한 얻을 수 없건만,

未審上座 點那個心 미심상좌 점나개심, 어찌 그대는 무슨 마음(心)을 찍겠다(點)는 것인가?   

  

금강경 한 소절 일러주고 점심을 먹겠다는 덕산에게 노파가 금강경엔 점심(點心)을 할 수 없는데 어찌 점심(點心)을 하려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재미로 보면 언어유희입니다.

선종사(禪宗史)에 유명한 공안(公案)으로 내려오는 것이라 합니다.

일반이 안다는 선문답(禪門答)입니다.

당대 최고로 금강경에 능통했다는 덕산(德山) 스님을 깨우친 이는 일자무식해 보이는 길거리 한 노파 상인이었습니다.


내가 재밌다(?)고 했던 건 ‘점심(點心)’입니다.

점심(lunch)이란 말은 중국에서 조반주식(朝飯晝食), 아침밥과 낮에 먹는 것, 그사이에 간단히 먹는 소식(小食), 간식(間食)이라 하던 것이 훗날에 점심(點心)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나라 때 한의학에서 먹는 음식은 오장육부에 기(氣)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라 했답니다.

마음(心)이란 오장육부를 대표하는 것이라 보았기에,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마음(心)에 점(點)을 찍는다’는 의미로 점심(點心, lunch)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마음에 점을 찍는다’

‘점을 찍는다’는 말은 마치 ‘마침표를 찍다’로 들립니다.

무언가 끝을 봤다.

결정을 내렸다는 표시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단호한 결정은 한편으론 대단한 결심과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각오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세상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찍은 점(點)이라 할지라도 지워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은’, ‘마음먹은’ 굳은 마음의 결심과 결정이라 해도, 돌아보면 ‘마음먹은 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노파의 말처럼, 어제, 오늘, 내일 마음을 얻을 수 없는 데, 무슨 마음을 정할/찍을(點) 생각들은 마음만 어지럽힙니다.

마음에 점을 찍지 않고, 찍힌 점마저 지운다면 빈 마음 허심(虛心)입니다.

‘까닭?’의 질문에서 빠져나오는 길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노파와 헤어진 덕산은 용담(龍潭) 스님을 찾아갑니다.

‘A가 B를 만났다’는 말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날지도 모릅니다.

초보 입문자인 나는 ‘한 스님이 큰 스님을 찾았다’로 읽습니다.


용담이 덕산에게 말합니다.

밤이 깊었는데 네 방으로 어찌 가지 않느냐?

밖이 어두워서요

용담이 촛불을 켜서(點) 덕산에게 건네줍니다.

덕산이 촛불을 받으려 할 때, 용담이 촛불을 훅 불어서 꺼버립니다.

그때, 덕산은 크게 깨닫고 큰절을 올리고 물러났다는 공안(公案)입니다.


‘불을 켜다’는 말을 점화(點火)라고 하지요.

스승은 밤이 깊었다, 어둡다는 것을 알고 나가보라고 합니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제자는 어두워서 나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스승은 불이 있으면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로 시험합니다.

불을 밝혀(點火) 줍니다.

그리고 제자의 생각을 훅 불어 끕니다(消火).

어둠을 밝히는 것, 그 결정적인 것, 그 점(點)을 버린 것입니다.

무언가를 가지고서 해결하려는 마음을 지우는 것입니다.



오랜 날들을 점심(點心)으로 때우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마다 정한 마음대로(點心) 되어 오지 않았던 것들도 떠오릅니다.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 의지를 굳게 세우는 도전과 용기일 줄 알았습니다.

도구이고 방편이었습니다.

나를 드높여 세우려는 것들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분별(分別)과 간택(揀擇)입니다.

불을 밝히라고 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혁명의 횃불을 치켜세우라고 목청껏 외쳤습니다.

불 없이 어둠 속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불교에서 열반(涅槃)을 산스크리트어로 Nirvan이라고 하고, ‘불어서 꺼진 상태’라 한다네요.

아직 깨닫기는 어둡습니다.


점심(點心)을 거르는 허심(虛心)으로 ‘슬기로운 감방생활’을 하렵니다.

노자가 일러준 것이기도 합니다.

비움(無爲)이 그 씀(爲)을 다할 수 있습니다.


삼십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를 이루고,
그 가운데 비어 있는 공간이 바퀴의 쓰임을 만든다.
점토를 빚어 그릇을 만들고,
그 속이 비어 있어야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집을 짓고,
그 안의 빈 공간이 집으로서의 쓰임을 만든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에서 이로움을 얻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쓰임을 얻는다.  


노자 도덕경(道德經) 11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가면 당신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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