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수의 계절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온수 목욕탕에 갑니다.
감방 안은 일 년 내내 찬물입니다.
온수 목욕을 가지 않는 일주일에 6일은 찬물로 샤워를 합니다.
첫겨울의 혹독한 기억은 찬물이었습니다.
안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릇 하나 씻을 때도 온몸을 떨었습니다.
인간의 진화가 여전히 진행 중인 게 맞습니다.
감옥에서 진화의 속도를 체감합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존 본능의 움직임을 피부로 느낍니다.
이제는 아침에 찬물로 간밤의 꿈을 깨우고, 자기 전 찬물로 형기의 긴 하루를 지웁니다.
감옥의 목욕탕은 ‘문신전시장’ 같습니다.
밖에 있을 때, 사우나에 가면 문신한 사내 옆은 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피할 곳도 없습니다.
문신이 없는 이만 벌거벗은 모습입니다.
문신에도 세대 차가 있어 보입니다.
젊어질수록 온몸을 덮습니다.
그리고 컬러판입니다.
무슨 그림인지, 글씨인지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의 문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색이 바랬습니다.
푸르스름한 단색입니다.
독수리, 호랑이, 용,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必勝 이 주 된 소재입니다.
R.O.K.M.C. 를 새긴 이는 해병대 출신입니다.
중년의 사내는 척추선을 따라 세로로 ‘남아일언중천금’이라 썼습니다.
멋진 궁서체 필체입니다.
서예전에 걸어도 어울릴 듯싶습니다.
가장 색 바랜 문신은 오른쪽 어깨에 하트에 화살이 꽂힌 푸르스름한 노인의 문신입니다.
감옥의 목욕탕엔 탕이 없습니다.
샤워기 아래서 15분 목욕시간은 충분합니다.
같은 방 사람끼리 한 데 모여서 서로의 등을 돌립니다.
벌거벗은 사내들이 ‘형님’하며 90도 절을 합니다.
우리 방 방장이 이곳에서 보스인걸 안 건 목욕탕에서였습니다.
방장은 만기출소를 한 달 남겨두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나에게 고급스러운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희미하지만 온갖 그림, 무늬들이 흐릿한 컬러로 바탕에 깔렸습니다.
여기서는 못 만드는 게 없어 보입니다.
곳곳에 기술자들이 있고, 어떤 경로인지 모르게 우리 방 보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보스는 출소 후에 액자를 걸겠다고 했습니다.
제목 아래 “재1은..., 재2는 ...”
삐뚤빼뚤 오타 없이 맞춤법이 틀린 메모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멋진 붓 펜도 주었습니다.
내 편지봉투 글씨를 보고 내게 써 달라고 했습니다.
“제 일은, 아내에게 충성하기. 절대복종하고 한눈팔면 눈깔을 뺀다!”
“제 이는, 나가자마자 혼인신고한다!”
...
어젯밤 늦게 보스가 내 담요를 꿰매주었습니다.
두 장을 하나로 만들어 준 겁니다.
보스는 바늘과 실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식사 전에 당직 교도관이 와서 내 이름을 불러 이송 준비를 하라고 전해주고 갔습니다.
보스는 어젯밤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릅니다.
얼마 전 주임 교도관이 와서 이곳 도서담당 도우미 일을 해 보겠느냐고 묻고 갔습니다.
보스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감옥에도 등급이 있는 걸 들어와서 알았습니다.
재소자마다 전과와 형기들에 따라 분류심사를 받고 등급이 정해집니다.
그리고 등급에 맞는 교도소로 이감(移監) 갑니다.
보스는 등급에 맞게 상급교도소로 가라고 한 겁니다.
교도관의 추천보다 보스의 말을 듣는 게 낫다는 판단은 방 사람들 모두 같았습니다.
감옥은 전국에서 모인 곳입니다.
오고 가는 이야기는 자기 고향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에 있던 교도소 이야기들입니다.
전국을 거의 다 돌았다는 이도 있습니다.
다 같은 교도소가 아닙니다.
어디는 감옥이고, 어디는 교도소, 또 어디는 수용소, 연수원이라고 부릅니다.
어디는 ‘깜빵’이라고, 거기는 정말 가지 말라는 곳도 일러줍니다.
내가 호텔 예약이라도 할 듯 말립니다.
아직도 방이 마룻바닥인 곳도 있다고 합니다.
잠자리를 '9시에 깐다' 보다 '8시 30분에 깐다'는 곳이 더 좋은 곳입니다.
어디는 교도관들이 반말하지 않는다.
어디가 밥이 좋다.
전국 맛집 교도소들 이야기는 끝도 없습니다.
소내 전방이나 타 교도소로의 이송은 사전 낌새도 없이 적의 급습처럼 닥칩니다.
보스 덕분에 여유롭게 이송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날 밤 두툼한 이불까지 둘러맬 수 있었습니다.
한 걸음도 배웅하지 못하는 방 식구들이 방 창살에 얼굴을 대고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다시 호송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밖은 온통 단풍입니다.
짙은 선팅창이 밖의 단풍물을 더욱 짙게 했나 봅니다.
호송버스 앞 유리로 눈을 돌리니 아직은 푸른 잎이 더 많습니다.
달리는 버스 위로 낯익은 도로표지판들이 지나갑니다.
많이 다녔던 찻길입니다.
호송버스는 두 군데 교도소를 거쳐 오면서 재소자들을 떨구고 나까지 세 명이 종점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에 세 명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여기는 연수원 같은 분위기입니다.
복도가 넓고 훤합니다.
복도가 감옥과 연수원의 차이를 가장 먼저 느끼게 합니다.
이감을 가면 제일 먼저 검은색 복장의 교도소기동대가 큰소리를 지르며 맞이합니다.
그리고 이삿짐 검사를 합니다.
새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감옥에서 감옥으로 옮겨오는 이삿짐이어도 그들은 불법 개조 물품들을 잘도 찾아냅니다.
오늘 우리 이삿짐을 받아준 이들은 재소자들입니다.
일하는 도우미들입니다.
이곳 사정들과 꼭 필요한 정보들을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에 세 명이 같은 시간에 들어왔는데, 나이순으로 내가 방장이 됐습니다.
잠시 후,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각 방 재소자의 식사, 및 잔심부름을 하는 사동 도우미가 우리 방을 찾았습니다.
여기서는 사소라고 부릅니다.
두 달 전 한 방에 있던 청년이었습니다.
서로 창살을 사이에 두고 반갑게 만났습니다.
뭐 필요한 게 없느냐, 아무거나 다 말해라... 그도 재소자인데 그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는가 싶지만 정말 아주 많습니다.
배식 양이 다릅니다.
국자는 바닥을 긁어 담아 줍니다.
기동대 순찰이 오면 미리 알려주겠다며 종일 누워있으라고 합니다.
여기가 본소는 아닙니다.
분류심사를 받고 등급에 맞는 본소로 마지막 이송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담당 주임님이 불러서 갔습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마셨던 그 어떤 커피보다 진한 맛이었습니다.
“두세 달 편히 쉬다 가세요.”
감옥에서 ‘쉰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당신에게 나의 ‘쉴 곳’을 전하는 게 주저되기도 합니다.
타지에서 고향 사람 만나듯 반갑게 다시 만난 그 청년 사소가 나에게 제일 먼저 전해준 이곳의 정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