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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Nov 13. 2024

쓰고 읽는 노래

감옥에도 빨간 날은 쉽니다.

당신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는 날입니다.

보내지도 못하는 날입니다.

밖에서와 밖으로의 소식이 쉬는 날입니다.


“당신 편지는 읽기도 전에 나를 배부르게 해요.”


휴일이 지난 편지에 보너스가 들었나 봅니다.

퇴근이 없는 남편이 아내에게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편지만 두툼하게 합니다.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아 든 미소 띤 주부의 모습은 어머님 세대가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감옥의 일상은 시계대로 움직입니다.

일어나는 시간, 먹는 시간, 운동시간, 잠자는 시간이 매일 정해진 알람입니다.

한 달에 세 번 할 수 있는 전화는 때마다 삼 분입니다.

오래전 10원짜리 동전 두 개 넣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삼 분이었지요.

옛날 삼 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때 20원이 지금 20원이 아닙니다.

접견실 투명창 사이로 당신을 보는 데는 15분입니다.

당신은 보려고 하루를 보냅니다.

헤어질 때마다 다음엔 오지 말라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당신은 돌아서면 금방 잊나 봅니다.


나에게 자유로운 시간은 읽고 쓰는 시간입니다.

오후 3시 30분, 쾨닉스베르크 시민들은 산책 나온 칸트를 보며 시계를 맞췄다고 하지요.

나는 매일 오후 3시부터 교도관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으면 오늘이 휴일인 걸 압니다.

매일 오는 편지라 호명도 없이 교도관이 철창 사이로 당신 편지만 쑥 내밀어 주고 갑니다.

군대에서 애인편지는 내무반을 빙 돌곤 했습니다.

여기서는 보여주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쓰고 난 편지는 돌려가며 읽습니다.

어쩌다 내 편지를 본 이가 조른 것이 방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편지가 안과 밖을 연결하는 끈이라면, 끊어진 이도 있고, 끊은 이도 있어 보입니다.

미결사동에 있을 때, 이혼장에 손도장을 찍는 이를 보았습니다.

엄마를 본 적 없다던 청년은 이번이 세 번째라 했습니다.

기결사동에 나이 든 이들은 오래전 혼자가 된 이들이 많습니다.

안에서 혼자 늙어간 이도 있습니다.

처음 본 이들과 좁은 방에서 같이 먹고 자고 24시간을 함께 사는 일이 처음입니다.

각자 얼굴 생김새와 작은 움직임들, 주고받는 짧은 말들을 스치듯 듣다 보면 하나하나가 소설 속 인물입니다.

쓰고 싶어도 재주가 없고, 글로 옮기면 돌려가며 읽게 되니 마음속에만 스케치로 그려놓습니다.


여기서 읽고 쓰는 일은 자유롭습니다.

듣는 일이 불가합니다.

듣지 못하고 부르지 못하는 노래를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오래된 「대중가요집」을 발견했습니다.

군데군데 뜯겨 있습니다.

언제 감옥에 들어와서 언제부터 남겨진 것인지 모르는 헌 책입니다.

기타도 없는 곳에서 보물지도를 본 듯했습니다.

부르지 못하고 다 기억나지 않는 노랫말들을 노트에 하나씩 옮겨 적습니다.

듣고 부를 땐 몰랐는데, 쓰고 읽다 보니 모든 게 너무도 아름다운 한 편의 시들입니다.


제일 먼저 찾아 옮겨 적은 것입니다.


북한강에서 - 정태춘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 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갯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쓰고 나서 소리 내 부르진 못해도 읽고 또 읽습니다.


‘북한강’이라 쓰고 ‘감옥’으로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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