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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Oct 06. 2024

꿀 길잡이 새

아프리카 한 원주민이 숲에서 휘파람을 붑니다.
예쁜 새 한 마리가 나타납니다.
새도 휘파람을 붑니다.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 듯합니다.
새가 휙 날아갑니다.
노인은 새소리를 찾습니다.
노인이 휘파람을 붑니다.
새가 휘파람을 붑니다.
노인은 새의 휘파람을 따라갑니다.
새는 노인을 부르고 노인은 새를 부릅니다.
노인은 따라가기를 몇 차례 하더니 큰 나무 아래에서 발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나무를 기어 올라가 거기에서 꿀벌 집을 땁니다.
연기를 피워 벌들을 진정시키고 꿀을 채취합니다.
노인은 벌집 일부를 나무 아래 놓아둡니다.
노인이 떠나고 새가 벌집으로 날아와 꿀을 먹습니다.
원주민 부족은 그 새를 ‘꿀 길잡이 새’라고 부른답니다.


문명인이 노인에게 말합니다.

“꿀을 남겨 주어야 다음에도 꿀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거군요.”

노인이 문명인에게 말합니다.

“꿀을 주어야 꿀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게 아니라오.”

문명인이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모습으로 노인을 쳐다봅니다.

“꿀을 주지 않으면 맹수에게로 데리고 갈 거요.”

노인이 혼잣말하고 떠납니다.


노인이 의지하는 ‘길잡이’는 꿀로 가는 길이 아니라, 맹수에게로 가지 않게 하는 길 안내입니다.

천국 가는 길 안내와 지옥으로 가지 않는 길 안내는 서로 같은 것일까요?

그 말이 그 말 같아 보이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비록 꿀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맹수에게로 가지 않을 길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꿀을 얻기 위해서 꿀을 주는 게 아닙니다.

독을 받지 않기 위해 꿀을 주는 것입니다.

종교는 문명인이 생각하는 ‘꿀 길잡이 새’가 아니라, 원주민 노인이 믿는 ‘꿀 길잡이 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누구에게나 ‘꿀 길잡이 새’ 한 마리 정도는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꿀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믿든, 맹수에게로 데려가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든, 그것이 같든 다르든 각자의 길잡이 새 한 마리는 있어 보입니다.

한 마리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을 겁니다.


나의 ‘꿀 길잡이 새’에 대해 생각합니다.

도킨스가 말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일지도 모릅니다.

문명인이 추측했던 ‘꿀 길잡이 새’는 꿀을 얻기 위한 거래의 목적이 수반되는 관계(새)입니다.

원주민 노인에게 ‘꿀 길잡이 새’는 꿀을 얻는 게 조건이고 목적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살기 위해 살려 주는 것이지요. 아니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조화입니다.


밖에서는 꿀을 얻기 위해 꿀을 주며 살아왔던 날들이었습니다.

만나고 헤어졌던 날들에 ‘꿀 길잡이 새’가 있었지요.

아니 어쩌면 ‘꿀 길잡이 새’를 새장 안에 넣어 키워 왔는지 모릅니다.

밖에서 나는 원주민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안에서 나는 점차 원주민 노인이 되어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꿀의 그리움보다는 맹수의 두려움을 먼저 떠올려야 했었나 봅니다.

이제는 하루하루 두려움보다는 평온의 날들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노인이 휘파람을 부는 심정입니다.

더는 두려움에서 새를 찾지 않았을 겁니다.

조건과 목적에 수반한 관계는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상호조화인 상생의 관계는 오랜 자연의 순리입니다.

내가 이제 여기 감옥에서 따라가야 할 ‘꿀 길잡이 새’를 찾습니다. 나에겐 고전(古典)입니다.


‘꿀 길잡이 새’를 떠올리다 도연명을 찾았습니다.

국화를 따고 있다가 문득 남산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오두미(五斗米, 다섯 말의 쌀)를 위해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관직(官職)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도가(道家)적 사유의 삶을 살았다고 하는 도연명(陶淵明)입니다.

감옥에서 도연명의 청빈과 자연의 소박한 삶을 유유자적하게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찾아 나선 길도 아닙니다. 가진 빈손과 누운 바닥이 청빈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해야 하는 일은 있습니다.

철창과 사방 벽에 갇혀서 도가적 사유를 끄집어내는 일은 감옥을 나의 자연으로, 나의 ‘꿀 길잡이 새’로 만드는 일입니다.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사람 사는데 집을 짓고 살지만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수레와 말의 소란함은 들리지 않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그대여,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묻는가?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이 멀리 있으니, 내가 사는 곳도 절로 고요하지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문득 남산을 바라본다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의 기운은 해 질 녘에 더욱 아름답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날던 새들 짝지어 돌아오네

此間有眞意(차간유진의) 여기 참뜻이 있으니

欲辨已忘言(욕변이망언) 말을 하려다 이미 말을 잊었네


도연명 - 「음주(飮酒)」 제5수의 글입니다.


그가 살았던 초가가 어땠을지는 모릅니다.

내가 있는 이곳의 모습보다는 좋아 보입니다.

여기서도 도시의 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습니다.

몸이 떨어져 나오면서 마음도 따라 나왔습니다.

감옥은 깊은 산속 암자보다 더 고요합니다.

이전에 옥담 아래서 민들레를 보았다고 했지요.

아무 데나 피는 꽃,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

그래서 아무나 올 수 없는 감옥 안에 홀로 피어 있던 민들레였지요.

도연명은 국화를 따다 남산을 보았다는데, 나는 민들레를 보고 홀씨 되어 이송(移送) 왔습니다.

해 질 녘에 새마저 높은 옥담을 휘어져 날아갑니다.

철창 사이로 붉은 노을을 볼 수 있습니다.

내 무슨 깊은 뜻이 있어 말을 잊는 지경에는 아니어도 말을 끊은 지는 오래입니다.



옥담은 밖의 소리를 막는 벽입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만 넘어옵니다.

새들도 휘어져 넘어갑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휘파람 소리로 들립니다.

내가 따던, 따서 묻어두었던 꿀들은 이제 어디에 있는지를 잊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멈추면 나는 혼자 속으로 휘파람을 붑니다.

자클린의 눈물 소리 같습니다.


당신이 보내주는 편지는 나의 ‘꿀 길잡이 새’의 휘파람입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가 당신이 찾아갈 휘파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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