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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그레이 Jun 11. 2024

10살, 죽으려는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5화 죽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삶은 갈수록 길을 잃어갔다. 집에서는 해충처럼 흉물스러운 존재였고, 학교생활도 엉망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나를 진정한 미아로 만든 주역은 아버지였다. 그를 향한 증오는 내 영혼을 짓밟고 가시덤불로 옭아맸다. 어머니의 학대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때는 모든 게 내 잘못인 줄 알았다. 내가 매를 자초했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어느 날 밤, 부모님은 서로 삿대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머리로 처박고 주먹까지 휘둘렀다. 어머니의 코에서 피가 세 갈래로 빠르게 흘렀다. 그녀는 주저앉아 아버지를 노려봤다. 아버지는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난 사람처럼 씩씩댔다. 어린 이순신이라면 이 불의 앞에 활을 당겨 아비라도 쏘려 했을 것이다. 나는 의분에 떨면서도 멍하니 서있었다.  


어머니는 수건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주었다. 그녀는 나를 안고 오열했다. 피로 젖은 수건을 펼쳐 보이며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냐고 물었다. 나만이 자신의 버팀목이라며 울부짖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충돌한 날이면 여지없이 나를 안고 속삭였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 어디를 맞았고, 얼마나 아팠는지를 세세하게 토로했다. 내가 목격하지 못한 사건들과 너무 어렸을 적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 일들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자세히 전했다.


아버지를 향한 증오가 나를 뒤흔들었다. 정신이 몸에서 분리되어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속이 끓어올라 위장이 뒤틀렸다. 분노가 치솟는 내면과는 달리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압력추가 없어 증기를 배출하지 못하는 밥솥 같았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이따금씩 내 반응을 살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슬픔을 느끼는지 물었다. 나는 아버지를 꺼꾸러뜨리고 싶다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곁에서 듣고 있을 때도 주저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더 심각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부모님과 함께 탄 빨간 차가 사고로 뒤집혀 모두 죽는 꿈을 꾸곤 했다.


내가 죽어야만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다.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이 심정을 알리고 싶었다. 학교 대강당에 불을 지르고, 화염 속에 장렬히 산화하기로 했다.


가로등도 눈을 감은 자정의 고요가 찾아왔다. 가족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라이터와 참기름을 가방에 챙겼다. 계획은 완벽했다. 마지막 해와 손잡고 학교에 가면 찬란한 홍연을 그리며 타버릴 삶이었다. 후련하고 행복했다. 세상살이에 대한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겸허한 자세로 자리에 누웠다.


왜인지 코가 막혔다. 불안정한 호흡을 억누르고 동생들의 뺨을 어루만졌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랑스러웠다. 이들과 조금만 더 함께하고 싶다는 미련이 들었다. 내쉬는 숨과 밀려 나온 눈물에 애한을 실어 보냈다. 내가 떠남으로써 동생들에게 더 나은 삶이 펼쳐질 거라 믿었다. 죽더라도 이곳에 혼을 남겨 영원히 곁을 지키리라 맹세했다. 속으로 잘 지내라, 사랑한다는 종단의 인사말을 남겼다.


한참 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일어났다. 내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철렁했지만 들키지 않기만을 바라며 계속 자는 척했다. 그녀는 불을 켜고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것들을 왜 챙겼는지 물었다. 난 참기름은 학교에서 먹기 위해서고, 라이터는 단지 호기심에 가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렇게나 둘러댄 것이었는데 나름 그럴싸했다. 그녀는 신경이 거슬린 듯했지만 그냥 넘어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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