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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없이 그림을 덮어버렸다

by 윤서린

저번주에 그리다 말았던 <월든 호수> 그림이 결국 물감으로 덮였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으면서 그가 말하는 호숫가를 늘 머릿속에 그려보며 책을 읽었다.

그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상상 속의 월든 호수는 그림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붉게 노을 지는 하늘의 구름과 호수에 비치는 구름... 어스름한 저녁풍경을 상상했는데...


잠시 고민하다 미련 없이 그림을 물감으로 덮고 백칠을 두어 번 다시 했다.

그 위에 다시 그린 그림이 <죽단화와 나비>라는 그림이 됐다.


tempImageSekx6M.heic <죽단화와 나비> 20250510 캔버스, 아크릴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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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호수> 미완성 2025 캔버스, 아크릴화


그림을 덮으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이 그림이 100년 후 복원작업을 하다 밑에 그려진 <월든 호수>를 사람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죽단화와 나비>라는 작품이름이 <노을 진 월든 호수의 죽단화와 나비>가 되고 이 작품은 늘그래 작가의 초기작품으로 가치가 수백 배 오르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좋구나...)


이런 엉뚱한 상상을 그림벗들과 화실 작가님께 이야기했더니 사후 100년은 너무 길다고 한다.

이왕이면 생전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게 좋지 않겠냐며....

앗.... 그러네...


이 그림이 마음에 들어 누군가가 소장하게 된다면 이런 숨은 이야기도 꼭 들려주고 싶다.

덮혀진 <월든 호수> 그림도 보여주고....


오늘 그린 그림은 고민 없이 과감하게 덮은 그림덕에 탄생된 새로운 그림이다.


포기할 때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용기라면 용기.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용기다.


요즘 꽃이 한창이기에 눈에 보이는 꽃은 보이는 대로 사진으로 찍어둔다.

그러면 이렇게 물감을 덧입은 꽃으로 다시 태어난다.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길가에 심어졌던 죽단화.

지난 10년 가까이 피어있다는 그 존재 자체도 몰랐던 꽃이었다.

길에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숨 가쁘게 바쁘고 우울했던 나날들...


늘 내 주변에 있는 하늘, 꽃, 나무, 바람, 구름, 새소리...

자연이 매일 주는 선물보따리를 나는 제때 풀어보지 못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작년에 이어 올해 봄에 이 노란 꽃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죽단화의 노란 꽃잎들이 앞다투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5월이다.

나는 한마리의 나비가 되어 새로 피어날 꽃송이들에게 날아간다.


너도 나도 참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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