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떠다니는 단상들을 하루동안 붙잡았다가 묶어 내는 글
* 연재북에 발행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다시 재발행하는 글입니다.
by 윤서린 NOV 26.2025
————-
겨울비는 묵직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비가 아니라 눈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함박눈이겠지....
그런데 비를 비로 받아들이기보다 눈이 됐으면 바라는 건 무 슨 심리인가.
있는 존재 그대로도 충분하거늘
—————
얼굴에 열기가 느껴진다.
목은 따끔거리고 건조하다.
몸에 힘이 빠진다.
아플 거라는 몸의 신호다.
이 신호는 꽤나 정확해서 나는 움찔하며 갖고 있는 비상약을 털어 넣는다.
————-
어찌 보면 몸은 마음보다 정직하다.
자신이 힘들다는 걸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이 요즘 들어 궁금해진다.
구석구석 하나하나 들여다보다 마침내 내 몸을 좋아하게 된 다.
불현듯 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고 건강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런 마음이 생김에 감사하게 된다.
————-
약을 먹고 뜨겁게 등을 데우면 잠이 푹 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의식은 내 옆에 누워서 말똥 하게 눈을 뜬 채 버티고 있다.
아프면 자야지 왜 컴퓨터를 껴서 노래를 발행하고, 글을 쓰 냔 말이다.
나는 무엇을 놓칠까 겁내고 있는 것일까.
지난번 폐렴으로 입원해서 산소호흡기 도움을 받으면서도 몇 시간에 걸쳐 새벽 독서 후 독서기록을 악착같이 쓴 것. 그것은 겨우 다잡은 나의 일상루틴이 깨질까 겁이 났던 나의 못난 모습.
아파도 독서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발버둥.
나는 오늘도 여전히 발버둥 중이다.
—————
2025. 11. 4일부터 <모닝페이지>를 쓰고 있다.
알람이 울리면 머리맡에 미리 놓아둔 노트에 만년필을 꺼내 엎드려 누운 상태로 무작정 아무 말이나 쓴다.
보통 잠들기 전에 글쓰기나 노래가사,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것들을 떠올리는데 그러면 자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스쳐간다.
몽롱한 상태에서 잠이 깨면 곧 의식이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 생각들도 흩어진다. 그럴 때일수록 잊지 않기 위해 재빨리 노 트에 받아 적는다. 말 그대로 글씨는 날아다닌다. 나도 몰라 볼 정도로. 그런데 그게 싫지 않다.
손글씨를 쓰면서 자유로움을 감각하고 있다.
줄을 맞출 필요도 맞춤법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
글자가 틀려도 찍찍 긋고 다시 쓴다. 이야기가 이어지면 노 트를 돌려 화살표로 잇는다. 생각이 자유로워지고 스트레스 가 풀리고 쌓여가는 아이디어가 흥미롭다. 그중에 얼마가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내가 떠올린 생각들을 붙잡아 놓을 수 있다는 게 재미있다.
머릿속이 꽤나 복잡한지 요 며칠은 즐겨 듣던 팟캐스트를 듣 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어려운 마음이다.
나는 내 안의 이야기들에 더 집중해 보기로 한다.
내가 원하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 내가 포기해야 할 것,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 등...
————-
내가 아끼는 무선 키보드에 자판 하나가 말썽이다.
"ㅅ" (시옷)이 잘 눌러지지 않아서 자꾸 글자가 틀려 다시 써야 하거나 힘을 주어서 눌러야만 한다.
자판 하나가 무엇이길래 왼손가락과 어깨까지 긴장시킨다.
지금도 계속 시옷 자판은 나를 힘들게 한다.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도 수십 번 시옷이 들어가는 글자들에서 버벅 거리고 있다.
2만 원짜리 휴대용 키보드는 멀쩡한데 왜 열 배가 넘는 이 키 보드는 이 모양일까.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내가 그동안 '시옷' 자판을 다른 자판보다 유독 많이 쓴 걸까?
도대체 내 삶에 어떤 단어들을 써온 걸까?
사랑의 시옷,
마음 밭 떨어진 시의 씨앗의 시옷,
노래 가사 속의 시옷,
글쓰기의 쌍시옷,
다시의 시옷,
싫다의 시옷,
쓸쓸하다의 쌍시옷,
있다, 없다, 했다, 봤다, 왔다, 갔다, 싶다의 쌍시옷.
아니면
스쳐간 세월과 삶 속에 숨어 있는 한 편의 시 같은 나의 수많은 단상들?!